저녁 전 다섯 시 무렵,
아랫집 아주머니는 조심스러운 얼굴로 올라왔고,
첫째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8시 이후엔 발뒤꿈치 들고 걸어줄 수 있지?
아줌마랑 약속! 요 밑에 할머니도 사시고 고3 누나도 공부하거든. 아래층이 너무 울려.”
첫째는 얼떨결에 손가락 걸고 반강제적인 약속을 하고 우리는 그저 '죄송합니다'로 현관문을 닫았다.
그날 저녁, 끊임없이 아이들 움직임에 '뛰지 마. 큰 소리 내지마. 그냥 앉아서 놀아'라는 잔소리를 이어가니 결국 두 아이들은 항의를 시작한다.
“엄마… 우리도 그냥 놀고 싶어. UN에 아이들에게는 놀권리가 있대!!”
아이가 움츠러드는 몸만큼, 모아 쥔 발만큼 마음도 움츠러드는 것 같아 팔이 안으로 굽는 엄마는 마음이 쓰인다.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아파트는 아주 오래된 구축이다. 아마 30년도 더 되지 않았을까.
시간만큼 벽도, 바닥도 예민해져 간다.
누가 뛰는 소리인지, 어디서 떨어진 소리인지,
출처를 굳이 따지지 않아도 일상의 작은 진동들이 쉽게 옆집, 아랫집, 윗집으로 번져간다.
아랫집이 틀린 것도 아니고 우리 집이 잘못한 것도 아니다.
그저 이 구조 자체가 사람들의 일상을 너무 가까이 붙여 놓은 탓이다.
그래서 어떤 날은 집 안에 있으면서도 긴장이 풀리지 않는다.
조심히 걷게 되고, 아이들의 웃음조차 순간적으로 주변을 먼저 살피게 한다.
이제 집은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공간’이 되었다.
집이 주는 피로감이란 게 이런 것일까 싶다.
엘리베이터, 난방, 편의시설. 한국의 아파트는 편의성과 안전함이라는 두 기둥 위에 최첨단으로 진화하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생명체 같다. 요새 지어지는 신축아파트들의 구조나 편리성은 가히 세계 최고일 것이다.
하지만 그 편리함 뒤에는 삶의 자연스러운 소리를 줄여야만 유지되는 암묵적 규칙이 있다.
뛰지 말기. 문 세게 닫지 않기. 저녁 시간대 조심히 움직이기.
그렇게 하나하나 일상의 소리와 행동을 제어하고 통제하다 보니 사실 많이 피곤하다.
아이들 키우는 집은 운신의 폭이 더 좁다. 내 집에서도 늘 죄송한 기분. 편치 않다.
그리고 아무 때나 아랫집에서 불쑥하고 찾아와 나의 쉼을 침해당하는 상황은 사실 정상이 아닐 것이다.
더 힘든 건, 이 구조가 불편해도 막상 벗어나기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아이가 조용히 걸으려 애쓰는 모습이 늘었고, 나는 발소리를 스스로 점검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조용히 긴장으로 채워졌다.
지금 나의 분명한 예측은
“이 문제는 앞으로 더 심해질 것 같다.”이다.
아이들은 더 활발해질 나이고 아랫집은 이미 예민해진 상태이다.
누군가 더 참아야 한다면 그 ‘누군가’는 결국 우리일 것 같다는 예감도 든다.
‘이사’라는 단어가 아주 구체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디로 갈 수 있을까? 1층이면 좀 나아질까? 전세는 얼마나 필요할까?
아이들 학교는? 출퇴근은?
일상은 여전히 굴러가지만 머릿속은 계속 계산 중이다.
워킹맘에게 이사 고민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삶 전체의 재배치에 가깝다.
집이 더 이상 '쉼'이 아니라 피곤의 또 다른 요인이 되어가는 요즘이다.
그리고 그 피곤이, 어쩌면 우리 가족을 다음 집으로 이끌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