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공간들을 만나고 온 나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에 다녀왔다. 언제부턴가 긴 휴일이 생겨 여행 계획을 세울 때 자주 서울에 가게 된다. 아이들이 점점 크면서 해수욕도, 산행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시큰둥해하는 애들이다. 그런데 서울은 그런 심드렁한 사춘기 아이들의 다양한 요구를 만족시켜 줄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긴 추석 연휴에도 별다른 고민 없이 서울에나 다녀오자고 했고 아들들도 모두 찬성했다.
사실 계획은 명절을 보내고 후에 다녀오고 싶었으나 그건 기차표와 공연 티켓 사정을 몰랐던 나의 순진한 계획이었다. 사람들도 모두 나 같은 생각을 했는지 서울에 다녀올만한 기차 티켓은 여분이 얼마 남지 않았고 기차 티켓이 있으면 공연 티켓이 남아있질 않았다.
그래서 예상했던 날은 아니었지만, 또 1박 2일 정도로 다녀오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현실에 타협하여 당일치기 서울 나들이로, 추석 전에 다녀왔다. 서울에 가자고 하며 하고 싶은 걸 찾아보라고 했더니 큰애가 관심 있던 '바스키아'의 전시가 있다고 다녀오고 싶다고 한다. 나는 저녁 늦게까지 서울에 있어야 하기에 저녁에 하는 뮤지컬을 하나 예매했다. 아이들과 함께 보는 공연은 원작이 있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라 영국 소설 '타조소년들'을 각색한 공연 티켓을 예매했다.
바쁜 일상을 부랴부랴 해치우고 오른 서울 나들이 길에 생각해 보니 사실 막내는 원하는 동선을 밝히지 않았다. 원하는 걸 말하지 않으면 동의의 뜻으로 생각하게 되기에, 바스키아 전시에 뮤지컬 관람이면 막내도 좋아하겠지 하며 대수로워하지 않았다. 사실 막내는 몇 년 전부터 아주 오랫동안 축구를 좋아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랬다.
DDP에 가서 '바스키아' 전시를 보는데 유년기의 강렬한 경험이 작품 곳곳에 오래도록 기호화되어 나타난 작품들이 내내 인상 깊었다. 바스키아는 어렸을 때 교통사고로 오래 입원을 했는데 그곳에서 '그레이아마토미' 해부학 책을 봤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바스키아의 작품에는 해골 모양과 사람의 혈관이 드러난 그림, 자동차의 모습 등등이 계속 기호화되어 등장했다. 작품들이 모두 실험적이며 전위적이고 강렬해 보는 내내 눈이 즐거웠는데 막내는 시큰둥하다. 생각해 보니 이맘때 큰애도 그랬다. 큰애가 중1 때 함께 유럽여행을 갔다가 프랑스 오르세에서 내내 심드렁한 큰애에게 화가 나 파리 한 복판에서 폭발했던 경험이 있던 나였다. 관심 있는 것이 아닌 모든 것에는 노잼을 선언하며 심드렁해지는 시기, 그 시기에 접어든 둘째였다.
본인이 보고 싶어 했던 전시여서 그런지 큰애는 한 작품 한 작품 꼼꼼하게 관람하는데 둘째는 이미 나가고 싶은 눈치다. 그런 둘째를 위해 대충 관람을 마무리하고 둘째와 먼저 나와 앉아 있었다. 잠깐의 짬이 생기면 둘째는 요즘 축구 게임을 하는데 게임을 별로 즐기지 않던 큰애를 키워서인지 그게 나는 참 못내 마음에 안 든다. 역시나 짬이 생긴 둘째는 바로 게임모드로 들어간다. 잠시 후 충분히 관람하고 나온 큰애가 게임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생에게 미안했는지 밥 먹고 근처 축구 용품샵에 가보자고 한다. 그제야 둘째가 전시는 재밌었는데 배가 고파서 빨리 나왔다며 빨리 밥을 먹고 가보자며 좋아한다.
그렇게 동대문 근처의 축구 용품 샵에 가보니 무려 4층짜리 건물에 빼곡하게 축구용품이 차곡히 채워져 있다. 한 층은 유니폼만, 또 한 층은 브랜드별로 나오는 축구화만... 사람들은 보통 1~3층에서 구경하는데 우리는 먼저 훑어본 막내가 위로 올라가야 진짜라기에 4층까지 올라갔다. 1~2층이 축구 가게라면 4층은 그야말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마니아들의 공간이자 박물관이었다. 가장 마지막 층은 축구 용품샵의 주인이 그동안 모아놓은 축구 용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인받은 축구화, 유니폼, 본인이 사다 모은 각종 축구 관련 굿즈들. 족히 10년은 넘게 모았을 것들이 유리 상자 안에 소중하게 들어있었다. 나는 죄다 모르는 선수였지만 막내는 연신 사진을 찍고, 이리저리 둘러보며 아주 신났다. 그런 둘째에게 큰애가 또 홍대 쪽에 있는 빈티지샵에 가보자고 한다. 원래 홍대 근처에 있는 연필 샵에 가려고 했던 우리였다. 문구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동생이기에 동생이 좋아하는 축구 유니폼 빈티지샵에 들렀다 연필을 사러 가자는 것이다. 축구 흥분모드에 접어든 둘째는 말하지 않았는데도 가는 길을 검색해 본다.
그렇게 도착한 빈티지 가게는 빈티지 유니폼이 백 벌 쯤은 있었다. 막내가 반가운 목소리로 엄마가 아는 베컴도 있다고 유니폼을 들어 보여준다. 전설의 축구 선수들 이름이 마킹된 당시의 유니폼은 축구 팬인 막내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유니폼뿐 아니라 응원할 때 필요한 각 구단의 수건과 배지들.. 그리고 가게 한쪽에는 새로 들어온 유니폼을 연신 다리미로 무심하게 다리고 있는 주인이 있다. 저 사람이구나. 이 많은 유니폼들을 수집해서 판매하는 사람이. 그 사람의 축구 사랑을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얼마 전부터는 나도 축구를 좋아하는 축구 팬의 대열에 합류했지만, 오늘 가 본 이 두 곳의 주인과는 견줄 수가 없겠다. 오랜 시간 하나의 스포츠를 이렇게 오랜 시간 사랑해 온 사람들. 문득 좋아하는 게 재능이고 소질이라는 황선우 작가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오늘 다녀온 두 개의 축구 관련 샵의 주인들은 모두 그 분야의 재능과 소질이 출중한 사람이었다.
이후에 갔던 연필만 파는 연필 가게 '흑심'도 엽서만 파는 '포셋 연희'도 다 하나를 깊이 좋아하는 사람들의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가게들이었다. 돈이 되든 안되든, 뭐가 될지 모르는 그 순간부터 좋아했던 사람들의 애정의 에너지가 가득 담겨있던 가게들을 다니니 물건을 사러 들린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열정과 애정을 구경하고 온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아침부터 짬만 나면 여행 중임에도 축구 게임을 하는 둘째의 축구 사랑도 좀 너그럽게 봐줘야 할까? 물론 이미 중간에 한 번 크게 화를 낸 터이지만, 눈 뜨자마자 전날 축구 경기 결과를 확인하고, 축구라면 새벽 기상도 마다하지 않으며 시도 때도 없이 축구 게임을 하고 공을 차는 막내를 말이다. 너의 그 축구 사랑들이 모여 무엇이 될지 생각하지 말고, 축구가 아닌 다른 것에도 좀 애정을 나눠주길 바라지 말고, 네가 좋아하는 것을 그냥 함께 좋아해 주고 응원해 주는 것. 나도 그래야 할까. 사실 쉽지만은 않지만 지금 내가 가장 열정을 쏟고 있는 것은 '아들 키우기'이니까. 조금은 흐린 눈으로 응원해 보자며 나를 다스려본다.
사춘기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상이나 여행은 수양에 가까울 때가 많다. 그런 시간들이 모여 결국 나도 성숙하게 될까? 아직은 미성숙한 엄마라 자꾸만 화가 올라오지만, 너른 사랑과 애정으로 잘 보듬어보겠다. 아이들이라고 내가 맘에 들기만 할까. 결국 사랑과 애정은 쌍방향임을 알면서 너무 나 혼자 씩씩댔나 싶다.
한 분야를 깊이 사랑한 사람들의 애정 어린 공간에 다녀와서도 나는 결국 내가 사랑하고 있는 아들 얘기로 귀결된다. 이 사랑을 어쩔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사랑하고 있다면 조금 더 넓고 관대해지기를. 연필 가게 흑심에는 주인이 모아 온 오래된 연필 상자들이 빼곡했다. 시간이 지나면 내 이 사랑들도 빼곡해져 못난 부분들은 시간으로 채울 수 있을까? 부디 이번 연휴에는 그런 마음으로 더 단단히 사랑해 보길 바라본다.
(@제목은 황선우 작가의 '아무튼 리코더'의 한 구절)
(@표지 사진은 영화 라라랜드의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