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세정 May 19. 2021

답이 없는 것도 답이다.

직장 생활 소고

A업체와는 협업할 일이 종종 있다.

그쪽 관계자가 이번에 바뀌었는데,

이 사람 가관이다.


이건 이래서 안된다

말하면 알았다 할 것을

이렇게 해주면 해주겠다고 하길래

해줬다.


장장 4일이나 메일에 답변이 없길래,

팀장을 통해서 연락했더니


'김레오 님'으로 회신을 한 것이다.

- 난 김레오가 아니다. 

이메일도 네 이름 약자로 'l'로 시작하고 메일 하단에는 내 서명도 있다.


회신 내용은 네 요청은 어려우니 못하겠다.

이해해라.

정중함과 예의 바른 어투로 포장했지만,

담긴 내용은 그거였다.


팀장은 보더니

"일부러 그랬네."

한마디 한다.


사실 내가 어려운 부탁을 한 거라면 이해를 할 텐데,

5분도 걸리지 않을 일이었다.

심지어 그간 해 왔고, 그게 그쪽 주 업무인데,

이런 식으로 대응하니 황당했다.


내가 예의가 없는 편도 아니고,

전화로 정중히 요청했고,

그쪽 요구에 맞춰서 메일도 보냈는데

이 무슨 경우 없는 행동인가?


답을 하지 않는 것도 답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굳이 메일 회신을 독촉하지 않았고,

도저히 안 되겠는 부분만 팀장을 통해 물어봤다.

- 팀장을 통해서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지만, 

나로서도 직접 연락하기가 부담스러웠다.

어찌 되었건 나는 그 파트는 꼭 회신을 받아야 했기에.


어릴 때는 이렇게 답이 없는 사람이 갑갑했다.

말로 풀어야지 뭐 하자는 건가?


그 마저도 내가 그럴 에너지가 있었고,

상대방을 이해해보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마음을 쓴 것일 게다.

이제는 늙어서 그런지 알아보고 싶지도 않다.


지금은 답을 하지 않는 것이 그 사람의 답이라 생각한다.




베프가 이런 말을 했다.

이제는 헤어질 때 상대방이 무얼 잘못했는지 이야기도 안 해.

그냥 끊어버려.

말해주는 건 그 사람 배려하는 거야.

자기 잘못으로 마음고생할 일이 생기면 그때는 느끼겠지.

- 사람을 잘 안변하니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언젠가는 그것이 '화'가 되서 나타날텐데, 

굳이 누구 좋으라고 알려주냐는 말이다.

이 친구의 화법은 좀 심오한데가 있다.


열렬하게 사랑하는 사이였다면 오히려 말이 불필요할 수 있겠다만,

친구, 동료, 선. 후배, 또는 이웃 등 적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이라면,

왜 그런지 설명을 해줘야 할 것 간다.

이유도 모른 채 상대방이 날 멀리한다면, 당황스러우니까.


말하기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이유를 말해주는 게 도의라고 생각한다.


재작년인가?

그런데, 내가 그런 짓을 했다.

이유도 이야기 안 하고 결혼식을 앞둔 후배에게 불참을 통보하고 

이후 오는 전화를 안 받았다.

- 자기애가 강한 아이라 연락도 한 번 한 것이 다였다만, 

일부러 안 받았다기보다는 사무실 전화를 받고 있어 못 받았다.

일부러 전화를 피했다는 오해를 풀고 싶지도 않았고, 

그 이후 서로 연락을 안 하면서 이유를 이야기하기도 애매해졌다.


가끔 그 일이 후회스럽냐고 물어본다면,

조금은 그렇다.

그 사람과의 인연과 좋은 추억이 아쉬워서가 아니라,

내 원칙에 반하는 일이라서 그렇다.


나는 친절한 편이다.

가끔 호구인가 고민도 한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자기도 자기가 좋은 사람인 걸 안다.

그래서 자기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고집도 세다.


내가 이렇게 생각할 정도면,

네가 크게 잘못한 거야

난 쉽게 화를 내는 편이 아니거든.


맞다. 나는 이렇게 자기 합리화를 했다.

이유도 말 안 하고 사람을 끊어내면서 말이다.

물론 상대방은 그다지 상처 받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지만,

어찌 되었건 일방적인 헤어짐은 무례하다.

- 그러나 '상대방이 나에게 저지른 무례는 어쩌란 말인가?'

라는 생각도 든다.

무례를 무례로 되갚는 것도 어리석긴 하다.

그러나 세련된 방법으로 이별?을 통보하고 싶지도 않았다.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너 너무 이기적이야.

이런 건 좀 아니지 않니?" 

라고 설명하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같은 업계 종사자다 보니 우연히 볼 일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쪽도 마찬가지겠지만, 

이후에도 굳이 좋은 게 좋은 거라면서, 관계를 유지할 마음도 없다.

그러기엔 난 상대방의 무례함에 놀랬고, 

'쿨하게' 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으니까.


이 일로 고민을 할 때,

-헤어짐이 아니라 전화를 못 받고, 

다시 걸어서 설명하지 않은 것에 대해 고민할 때,

이런 충고를 들었다.


"잘했다. 상대방에게 덕 볼 마음만 없음 된다. 

아쉬울 거 없으면 그냥 끊어라."

여기서 덕은 어떤 경제적인 이득이 아니다.

잘 지내보고 싶은 마음도 '덕'이다.


살면서 이런 일이 또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그런 일이 또 생긴다면, 

그래도 함께 했던 정을 생각해서 설명을 해줘야 하나?


안 맞는 사람이다 싶으면 피하고,

사전에 거리를 조절하거나, 서서히 연락을 줄이다 보면 이럴 일이 없겠지.

이 나이 먹도록 이런 일은 처음이었으니, 이후에도 없길 바란다.


이유를 설명하는 건,

설명을 해도 상대방이 못 알아먹을 것이라는 점,

나는 이미 마음이 정리되었는데, 상대방이 다시 잘해보려고 할 수도 있다는 점,

애매하고 미묘한 마음을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가능하면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답을 하지 않는 것도 답일진대,

나는 구질구질하게 답을 줘야겠다.








이전 06화 직장에서 이런 사람이 있다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