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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정 Sep 18. 2021

엄마, 얼굴에 그림 그리?

워킹맘 이야기

둘째가 3~4살쯤이었던 것 같다.

그날은 외국계 회사 면접이 있던 날이었다.

출근길에 힘줘서 화장을 하는데, 둘째 녀석이 슬금슬금 와서 구경을 하더니,

"엄마, 얼굴에 그림 그리?"라고 물었다.


'화장'이란 단어를 몰라, 자기가 아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다.

어찌나 웃었던지.

'화장=그림'이라니! 나름 본질을 꿰뚫는 말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 했던 말들을 모아놨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남아 더 잊지 않기 위해 기억나는 대로 담아본다.


처음으로 배를 타고 바다를 본 날,

큰 아이는 바다 바람을 맞으며 '바다'라는 단어를 온몸으로 배웠다.

이후 아이는 동네 천가에 가서도, 차를 타고 한강을 지날 때에도,

"밧다, 바다예요."를 외쳤다.

'바'에 어찌가 강하게 힘을 주던지.


레오(고양이)를 데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로 기억한다.

큰 아이가 레오를 쓰다듬으면서 한 말들을 녹음했다.

변성기가 와서 걸걸한 지금의 목소리와 달리 맑은 하이 톤이다.

그 전에도 이렇게 목소리가 담긴 동영상을 많이 남겼으면 좋았을 걸 싶었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아련하다.


발달과정 중에 하나인데,

아이들은 곧잘 의인화를 하곤 했다.


큰 아이는 바람에 누운 갈대를 보고는,

"엄마, 풀이 코 누워 자요."라고 표현했고,

도로 가장자리에 차들이 일렬로 주차한 모습을 보고는,

"엄마, 자동차들이 칙칙폭폭 해요."라고 했다.


어린이집을 다니던 시절에,

어디서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아이가 생긴다는 말을 들었는지,

"엄마랑 나랑 결혼해서 OO(둘째)이 생긴 거예요?"라고 물어봤었다.

- 불쌍한 아빠는 어디에?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질문에,

영악한 둘째는,

"엄마랑 있을 때는 엄마가 좋고, 아빠랑 있을 때는 아빠가 좋아"라고 대답을 했던 반면,

- 비록 테스트를 한 연령대가 확연히 차이가 나긴 하지만,

곧이곧대로 인 큰 아이는 엄마 아빠가 양쪽에서 이리 오라고 박수를 치니까,

엄마 쪽으로 기어가다가 아빠를 한번 쳐다보고,

이제는 아빠 쪽으로 기어가다 엄마를 쳐다보더니,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


지금은 질색을 하는 이야기지만,

큰 아이는 3년을 좋아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깜빡하고 큰 아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 생일인 것을 알림장에 기재를 못했는데,

그다음 날 생일잔치에서 그 아이가 다른 남자아이와 뽀뽀를 했다.

나를 보자마자 큰 아이가 씩씩 거리며 했던 말,

"엄마 때문에, OO이가 다른 남자아이랑 뽀뽀했잖아!"

이거 안 되겠다 싶어서, 선생님과 상의를 하고 작은 선물 바구니를 준비해 보냈다.

큰 아이는 OO이랑 그날 뽀뽀를 했다고 자랑을 했다.


한편 둘째는, 어린이집의 나쁜 남자로 불렸다.

첫 번째 어린이집에서는 여자 친구가 있었고, 그 둘은 여자아이가 집으로 돌아가는 3시쯤, 현관 입구에서 다정하게 포옹을 했다. 머플러를 둘이 같이 둘러 쓰기도 했다.

두 번째 어린이집에 다닐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둘째가 하원을 하고 태권도장을 가는데, 초등학생 누나가 길을 막은 것이다.

(누나) "너, OO이 알아 몰라?"

(둘째) "알아요."

(누나) "너 그럼 OO이 어떻게 생각해."

(둘째) "못생겼어요."

이러고 부리나케 태권도장으로 갔다고 한다.

길을 막은 누나는 알고 보니 둘째를 좋아하던 아이의 언니였다.


분명 비주얼로는 큰 아이가 나은데, 이 녀석은 지고지순하게 3년을 좋아했던 여자아이에게 어장관리를 당한 반면, 그냥 좋게 이야기해서 귀엽고 남자답게 생긴 둘째는 인기폭발이었다.


큰 아이는 그 어린이집을 졸업할 무렵

"나 이제 더 이상 OO을 좋아하지 않아."라고 말했고, 그 말이 OO이 귀에 들어갔다.

OO 이는 큰 아이를 구석으로 불러 벽에 세우고는 한 손으로 벽을 짚고

"너 정말 이제 나 안 좋아해?"라고 물어봤다고 한다.

그 말에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던 큰 아이는

"아니야, 나 아직 너 좋아해."라고 대답을 했다고 하던데,

그날 그 둘을 지켜본 담임 선생님이 너무 웃기다고 전화로 이 상황을 중계해줬다.


- 큰 아이의 어린이집 선생님은 큰 아이 담임을 3년을 했다. 20대 중반쯤 되는 이쁜 선생님이었는데,

아이들 학예회 발표회에서 아이들이 이렇게 컸다고 뿌듯하며 펑펑 울던 모습을 보고 엄마들 몇몇이 귀엽다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정말 아이들을 이뻐하는 게 보였는데, 사실 저렇게 마음이 여리고 착해서야, 회사 생활을 하기는 힘들겠다 싶었다. 천상 선생님.




친구가 해 준 말인데,

그래도 아이들이 커 가는 걸 보면 세월이 무상하지는 않다고 느낀다고 한다.

매일매일이 똑같아 보이지만,

어느덧 아장아장 걷던 아이는 얼굴에 여드름 나고 걸걸한 목소리를 가진 아이가 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사느라 이리저리 많이 치여,

그렇게 작고 귀여웠던 시절을 온전히 감사하게 여기지도 못했던 것 같다.


아침에, 생각난 김에 엄마가 우리 아이들에게 써준 시를 찾았다.

아이들 생일 선물로 준 돈 봉투에 가끔 시를 적어주시곤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는다.

방 청소하면서 치운 건 아니겠지?


나도 나이가 드나 부다.

이런저런 추억들이 아쉽고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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