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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정 Aug 24. 2021

모성은 당연한 걸까?

워킹맘 이야기

우리는 모성을 하나의 의심도 없이 자명한 명제와 같이 여긴다.

왜 우리는 '모성'을 아이가 태어나면 당연히 생기는 것으로 여기는 것일까?


모든 엄마는 아기를 사랑한다→나는 엄마다⇒고로 나는 아기를 사랑한다.

결론을 부정할 수 없는 삼단논법 같다.

그런데 모든 엄마가 아기를 사랑한다는 말은 사실일까?

한 명이라도 예외가 생기면 '모든'이라는 대전제가 무너지는데 말이다.


차라리, A라는 엄마도 아이를 사랑한다. B라는 엄마도 아이를 사랑한다.

"대부분의 엄마는 아이를 사랑한다"가 맞는 말일 것 같다.


자기애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면 사람들의 관심이 자신이 아니라 아기에게 향할 때,

아기를 질투할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성별이 같다면?


「너처럼 예쁜 아기는 내 평생 처음 봐!」

그 순간 마리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올리비에가 그녀에게 아기의 얼굴을 보여 주며 말했다.

「여보, 당신이 낳은 걸작을 좀 봐!」

그녀는 용기를 내서 자신이 낳은 아기를 바라보았다. 아기는 까무잡잡했고, 검은 머리카락이 1센티미터 정도 자라 있었다. 갓난아기에게 흔히 나타나는 붉은 발진도 전혀 없었다.

「당신을 꼭 빼닮았어. 그러니 이름을 올리비아라고 짓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녀가 말했다.

「아냐! 이 아이는 여신처럼 아름다워. 그러니 이름을 디안이라고 짓자.」 젊은 아빠가 결정을 내렸다.

마리는 남편의 선택을 받아들였지만, 그녀의 심장은 다시 얼어붙어 버렸다. 올리비에가 아기를 그녀의 품에 안겨 주었다. 그녀는 아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 더는 내 이야기가 아니야. 이제부턴 네 이야기야.'

때는 1972년 1월 15일, 마리는 스무 살이었다.

<너의 심장을 쳐라, 아멜리 노통브>


질투하는 엄마의 이미지는 한국인의 정서와는 거리가 있다.

모성애, 엄마의 희생을 너무나 당연히 여기는 문화에서

엄마들은 '질투'가 아닌 자녀 대한 '집착'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 같다.

자신의 감정을 인정할 수 없으니 사회가 인정하고 용인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자녀에 대한 과도한 사랑은 무관심보다는 덜 병적으로 보인다.

간혹 모성애라는 말로 미화되기도 한다.


결국 자녀에게 무관심한 엄마이건, 과도한 애정을 쏟는 엄마이건,

그 기저에는 엄마 자신이 있다.

전자는 그 마음이 직접적으로 표현된 형태이고, 후자는 '투사'라는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엄마와 딸을 구분하지 못하는 엄마는 딸의 희생도 당연히 여긴다.

둘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놀만큼 놀고 결혼하라는 충고에는 그 말을 건넨 어른들의 아쉬움담겨 있다.

모성애는 당연하지 않다.

철들 시간이 필요하다.

세상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는 걸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아이는 사랑스럽고 신비한 존재이지만,

모성애를 당연히 여기면서 엄마에게 ''기를 포기시키는 문화는 폭력적이다.

엄마도 엄마이기 이전에 자신이고, 자신일 수 있어야 온전하게 아이를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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