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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정 Aug 30. 2022

사랑은 유리 같은 것

사람 사는 이야기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는데, 라디오로 이 노래가 나왔다.

"정말 몰랐어요. 사랑이란 유리 같은 것. 아름답게 빛나지만 깨어지기 쉽다는 걸."

(중략)

"슬픔은 잊을 수가 있지만, 상처는 지울 수가 없어요. 오랜 시간이 흘러도 희미해질 뿐이에요.

사랑하는 그대여, 이것만은 기억해줘요.

그토록 사랑했던 내 영혼은, 지금 어두운 그림자뿐임을."


아, 또 듣다가 화딱지가 났다.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희미해질 뿐 사라지지는 않겠지. 볼 때마다 생각이 나겠지만, 어쩌겠나? 그 상처가 있어서 지금 네가 되었는 걸. 희미해졌으니, 이제 아프진 않겠네. 그냥 볼 때마다 생각이 날 뿐.


사랑하는 그대는 왜 네가 어두운 그림자뿐이라는 걸 기억해야 하는 걸까?

당신은 그 사랑했던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걸까?

밝고 빛나는 내 인생, 너 때문에 칙칙해졌다. 네가 책임을 지진 않겠지만, 가슴에 새겨라. 이런 말인가?

당초에 둘이 같이 사랑을 했으면 한 거지. 너 때문에 내가 어두운 그림자가 됐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왜 내 귀에는 가녀린 그녀의 목소리가 사랑한 걸 후회하고 남 탓하는 것처럼 들리는지 모를 일이다.

노래 속 주인공이, 쓰레기 같은 놈을 만나, 가슴속 한이 깊이 맺혀 이런 노래를 불렀을 수도 있겠다만, 목소리가 소위 여성스러워 그런 건지 어쩐 건지, '왜 너도 같이 사랑하고 남 탓하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 유리 같아 깨지기 쉬운 게 아니라, 나는 유리 같이 깨지기 쉬운 맑고 순수한 영혼인데, 너 땜시롱 어두운 그림자만 남았다. 너 어쩔 거냐. 잘 기억해둬.


게다가 왜 '정말' 몰랐다고 강조하는데? 몰랐으면 몰랐던 거지. '정말' 몰랐으면 뭐가 달라지는 건가? 상처는 너만 받냐? 상대방은 안받았겠니?


"이제는 알겠어요. 사랑이란 유리 같은 것. 아름답게 빛나지만 깨어지기 쉽다는 걸"

(중략)

"슬픔은 잊을 수가 있지만, 상처는 지워지지 않아요. 오랜 시간이 흘러도 희미해질 뿐이에요.

우리는 사랑을 했었죠. 기뻤던 적도 있었고, 슬펐던 적도 있었어요.

그토록 사랑했던 내 영혼은, 남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으로 더 깊고 풍부해졌습니다."


기왕이면 운율도 맞춰서 개사하면 좋겠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바를 담아 위 노래 가사를 바꿔봤다.


사랑은 양방향이다. 누가 누구 탓할 것도 아니고, 상처는 나만 받는 것도 아니다. 상처로 인해 나는 타인의 상처에 민감해졌으며, 함부로 다른 사람을 내 기준으로 재단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어두운 그림자만 남은 것이 아니라, 세상은 빛나기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고, 어두움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빛과 어두움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존재로 성숙해졌다.


상처가 남은 사랑 덕분에.

한줄 요약 : 사랑은 유리 같은 것. 남은 상처로 인한 어두움으로 비로소 타인의 어두움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기왕이면 그 사랑이 남기고 간 흔적을 어두움이라고만 칭하지 말자. 빛과 그림자 모두 나를 이루는 모습일 테니.


'내가 이 정도로 애지중지했는데, 어떻게 이렇게도 나를 아끼지 않을까?' 이럴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 자신이 지금까지 해주었던 선물들을 나열하거나 아니면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위험한 짓을 저지르기 쉽다. 선물이 대가를 바라는 뇌물로 전락하는 순간, 롤랑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선물을 교환경제로 변질시키는 순간이다. 상대방에게 받은 만큼 최소한 무언가를 자신에게 돌려달라는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니까. 자신을 채권자로 만들고 상대방을 채무자로 만드는 순간, 아끼는 사람을 위해 지금까지 기꺼이 감당 했던 배고픔, 수고, 노동 등의 가치는 부정되고 만다. 


“너를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좀 알기나 하니!” 사실이고 진실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아끼는 사람의 입에서 발화되어서는 안 되는 말이다. 굳이 이 말이 발화된다면, 그것은 아낌을 받은 사람의 입에서 나와야만 한다.

“당신이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 치뤘는지 잘 알아요. 고마워요.” 물론 그에 대한 대답은 미소를 띤 침묵이거나 아니면 “나는 별로 한 게 없어요.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정도일 듯하다.

<한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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