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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정 Nov 07. 2022

기업 입장에서 부모 찬스를 반대할 이유가 있을까?

회사란 말이지

기업 입장에서 부모 찬스를 반대할 이유가 있을까?


문유석 판사, <최소한의 선의>를 읽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하단 참고)


우리는 왜 블라인드 채용을 공정하다 여길까? 부모의 직업, 재산 정도, 인맥 등 타고난 조건에 따라 우리는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리기도, 험한 산비탈 고갯길덜덜 거리며 겹게 넘어가기도 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부모 찬스를 실컷 누렸으니, 회사 입사만이라도 자기 힘으로 해야 한다는 논리일까?


기업은 이윤을 남겨야 한다. 그렇다면 자기 목적에 부합하는 사람을 뽑을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집안 좋은 사람 인맥을 써먹을 찬스를 기업이 왜 놓쳐야 하는가? 집 돈이 많다면 취업을 조건으로 투자유치도 할 수 있을 텐데. 기업 입장에서 이렇게나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부모 찬스'를 고려하지 않고 채용을 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재능은 부모 찬스와 뭐가 다르지?


능력 = 재능 + 노력

타고나길 명석한 사람도 있고 남들보다 신체적 조건이 우월한 사람도 있다. 능 좋은 슈퍼카 vs 내연 비 떨어지는 불량 차만큼이나 타고난 재능이 다르다. 떤 재능은 시대에 따라 더 대접을 받기도 한다.


사람들은 부모 찬스는 배척해야 한다고 믿지만 타고난 재능은 존중다. 재능과 노력은 구분하기 쉽지 않다. 남들보다 빨리 성과를 내면 재미를 붙이기도 다. 분도 안되지만, 우리가 무엇 무엇에 뛰어나다고 할 때는 재능+노력을 같이 말하지. '노력'만 따로 떼내 말하진 않는다. 여기서 살리에르의 비극이 시작된다. 타고난 재능을 가진 자를 이기지 못하는 노력파 만년 2등은 서럽다. 사람들은 뛰어난 작곡가를 원하지, '노오력'만 열심히 하는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출처 : Pixabay>
구분 가능성 - 나 자신에게 속한 것

재능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능력은  자신에게 속한 것으로 보지만 부모 찬스는 니다. 와 구분이 가능하다. 시험과 같은 공개 경쟁에서는 '능력'이 선발 기준이 된다. 기업에 필요한 사람은 능력이 있는 사람일테니, (그 능력을 정의하는 게 어렵지만) 기업의 요구에도 부합한다. 그렇다면 능력대로 뽑으면 공정한 건가?

최소한 '부모 찬스'는 공정하지 않다. 게다가 부모와 나는 구분이 가능하다. 그러니 부모가 아닌 '나'를 평가해달라! 이런 요구 할 수 있지 않을까? 


*부모 찬스로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을 수도 있고, 폭넓은 경험을 쌓을 수도 있고, 타고난 인맥도 다를 수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부모 찬스는 '낙하산'을 말합니다.


잔인한 진실 - 비교 금지 vs 비교우위

종종 사람들은 사람마다 타고난 재능이 다 다르서로 비교하지 말자고 말한다. 다르니 우위를 가를 수가 없다는 전제를 깔고 하는 말 같긴 하지만, 그걸 굳이 입밖에 내진 않는다. 그 말에 일정 부분 동의 하지만 동의를 하는 이유는 재능에 우위가 없어서가 아니다. 비교 우위이기 때문이다. 

변호사와 비서의 역할분담 예처럼 비서 일도 변호사가 더 잘하지만(절대 우위) 시간당 생산성이 높은 일에 변호사를 투입하고, 낮은 일에 비서를 투입할 때 사회 전체의 생산량이 높아진다.

가치판단은 배제하자. 누구나 각기 다른 재능이 있다손 치더라도 사회가 원하는 재능은 다르다. 사회가 원하는 재능을 타고 난 것도 운이다.


부모 찬스 건 타고난 재능이건 둘 다 '우연'이 아닌가?

부모 찬스는 운(명) 7할, 나의 능력 3할로 나눌 수 있을까? 그 3할에서 타고난 재능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일까? 그렇다면 운(명)과 재능이 9할, 노력이 1할일까?


문유석 판사 글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우리가 블라인드 채용을 공정하다고 여기는 이유는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이 '나 자신'대해 평가를 하는 세상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운칠기삼이든 운구 기일이든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말 자체로 이미 억울하다.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는 의미니까.


한 줄 요약 : 우리가 공정하다고 여기는 것조차 (무한경쟁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사회적 배려 볼 여지가 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부모 찬스가 먹히는 세상이 아니기에, 능력(재능+노력)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험을 통한 경쟁만이 공정하고 시장경제에 맞는 거라고? 내가 왜 당신의 '노오력'에 대해 보상해야 되는데? 그거 '감성팔이’ 아냐? '떼법’ 아닌가?

… 대답이 어렵다면 시장 논리만으로 답을 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답하자면, '공공성' 때문이다. 그렇다. 겉은 자유경쟁 및 결과에 대한 승복으로 포장되어 마치 냉정한 시장 논리에 부합하는 것 같지만 시험을 통한 자원 배분 역시 효율성의 요구보다는 공공성의 요구가 더 큰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윤 극대화를 위해서는 훨씬 효율적인 수단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개 채용, 그것도 '블라인드' 공개 채용을 기업에게 요구하는 것은 영업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다.


다만 그것이 '공공복리에 부합하기에 정당화된다. 시험 만능을 주장하는 당신 역시 일종의 '사회적 배려’ 대상자인 것이다.

(중략)

노력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공공성에 기반을 두고 있듯이, 능력에 대한 사회적 평가 역시 공공성과 관계없는 자연법칙이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능력에 따른 차별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당연하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리 쉽지 않은 질문들이 꼬리를 문다. 우선 왜 타고난 '금수저’는 사회적으로 평가받으면 안 되고 타고난 능력은 평가받아야 되는가?


타고난 재산이나 신분에 따른 사회적 자원 배분을 정의롭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반면 타고난 능력에 따른 배분에 대해서는 딱 부러지게 이의를 제기하기가 쉽지 않다. '우연성'에 대한 보상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양자가 다를 것이 없는데 왜 어떤 종류의 우연성은 배척되고 어떤 종류의 우연성은 보상받는가?

<출처 : 최소한의 선의, p.214~p.215, 지은이 문유석>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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