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녀 - 뇌가 필요 없는 이유
직장 생활 소고
#1 그녀는 무식했다.
백치미랄까?
기실 '백치미'라고 불리는 여성들은 착하기는 하기에, 그녀에게 쓰기에는 조금 아까운 말이다.
- '백치미'라는 단어도 남성의 관점에서 여성을 분류하는 것이기에 쓰기에 불편하기는 하지만, 예쁘지만 무식한 그녀를 표현하기에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썼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무식함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OO이가 나보고 무식하대. 하하하"라고 맘 상하는 거 없이 말하는 걸 보고 놀랐다.
나 같으면 자존심이 상했을 텐데?
(그녀) "레오야, 근데 타일랜드랑 타이랑 뭔가 비슷하지 않아?"
(나) "야, 같은 나라야, 넌 재팬과 저패니즈가 다르냐?"
(그녀) "레오야, 근데 홀란드는 폴란드 옆에 있는 나라니?"
(나) "······"
미운 정도 정이라고, 그녀와 나는 같이 사는 동안 어느 정도는 막역하게 지냈던 것 같긴 하다.
그렇다고 그 시절의 내 상처가 사라지진 않겠지만,
적당히 좋은 시절도 있고, 마음 아팠던 시절도 있다고 하자.
#2 예전에 테드 강의를 보다가 무릎을 쳤다.
뇌의 기원에 관한 것이었다.
말미잘인지 뭐 인지 하는 강장동물은 유생 시절 꼬리를 가지고 바다를 헤엄치며 먹이를 구한다.
이때는 말미잘에게 '뇌'가 있다.
그런데 좀 더 자라서 ▲ 자기가 영원히 정착할 만한, 먹이가 풍부한 곳의 산호초를 발견하면,
▲ 말미잘은 자기 뇌를 먹어버린다.
▲ 더 이상 헤엄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산호초에 붙어 다가오는 먹이에 적당이 독을 쏘아 마비시킨 후 꿀떡 삼키면 끝이다.
그러니 굳이 뇌가 필요할 턱이 있나?
그 강의는 우리의 뇌는 '운동'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그 강의를 들은 나는 그녀가 생각났다.
▲ 자기가 영원히 정착할 만한, 먹이가 풍부한 곳의 산호초를 발견하면
→타고난 재능(⊃외모)이 있어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먹고살만하면
▲ 말미잘은 자기 뇌를 먹어버린다.
→ 사람은 생각을 멈춘다.
▲ 더 이상 헤엄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3 사실 나는 그녀가 대학을 나온 게 맞나?
영어시험을 어떻게 통과했을까 늘 의문을 품었더랬다.
자기소개나 면접은 대강 예상 질문 200개 답변을 달달 외우면 뭐 어떻게 통과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토론 면접을 어떻게 통과한 거지? 궁금했다.
-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어봤다.
"토론 면접 때 질문이 뭐였어?"
"글쎄? 기억이 안 나는데?"
"그래? 난 사람들이 핑퐁 말 주고받는데 한마디도 못하면 떨어질까 봐,
대화의 틈을 노리다가 다른 지원자랑 동시에 말하는 바람에,
얼결에 미안하다고 먼저 말하라고 한 게 다 였는데, 떨어지진 않았더라. 넌 어땠어?"
"나? 한마디도 안 했는데?"
- 그렇다. 토론 면접에 한마디도 안 하고 그냥 고개만 끄덕였단다.
그럴 줄 알았지만 정말 그녀는 예뻐서 뽑힌 거였다. 예뻐서 뽑는 게 말이 되냐고?
우리가 일한 분야에서는 그랬다. 그리고 그녀는 매우 매우 예뻤다.
그녀가 어떻게 면접을 통과했을까에 대한 나의 의문은
'누군가는 토론 면접에서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합격할 수 있구나'라는 씁쓸한 깨달음을 주었다.
#4 나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에는 그녀 지분이 꽤 있을 것 같다.
누군가는 애쓰지 않아도 대우를 받으니까, 당시 어렸던 나는 그게 몹시 억울했던 것 같다.
지금은 굳이 나를 누구와 비교하지 않지만, 20대는 그러하지 않은가?
무한한 가능성에 자신을 열어두기에 더 초초하고,
늘 자신을 남과 견주어 비교하고,
그래서 자신에 대한 이상한 자부심과 동시에 열등감을 가지는 시기,
그때의 내가 딱 그랬다.
그래서 나이 듦이 좋다.
나를 좀 더 알게 돼서 좋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을 구별할 수 있어서 좋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기웃거리지 않게 돼서, 내지는 못하게 돼서 좋다.
그래서 가끔 회귀 물(난 당당히 밝힌다, 판타지와 로맨스 소설의 40대 덕후임을!)을 보면서,
지금의 생각을 가지고 20대의 젊은 몸으로 회귀하면 어떨까?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본다.
어쩌면 젊음은 그래서 젊은이가 가지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하는 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