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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정 May 30. 2021

같이 밥을 안 먹겠습니다.

직장 생활 소고

#1 멘티가 멘토랑 밥을 안 먹겠다고 한다.


얼결에 신입사원의 멘토가 되었다.

나, 이 회사 공채 출신도 아닌데?

같이 엮어 줄 사내 네트워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나조차 회사 문화에 아직 적응을 못했는데,

왜 하필이면 나란 말인가?


앞길 창창한 그와 사춘기인 아들 2명을 키우는 나는

같은 대학 출신이라는 것 이외에는 딱히 공통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기왕 맡은 거, 잘해보자 싶었다.

열심병이 도져서,

신입사원 교육 자료부터 내 식으로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기존 것은 회사 연혁, 사업구조, 뭐 이런 식으로 되어 있어서, 딱 오리엔테이션용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둘째한테 배운 화면 녹화 기능을 써가며

- 구글 태스크로 업무 정리하기

- 하나의 업무가 여러 업무로 쪼개져서 이어질 때 어떻게 정리하고 처리할지

- 인근 병원, 맛집, 은행(feat. 마이너스 통장 이율)

- 괜찮은 업무 프로그램 추천을 담은 자료 등을 만들어 배포했다.

내 랜선 멘토인 최명화 님의 유튜브 동영상까지

'직장인으로 살기'라는 타이틀로 넣을 려고 했다가

이건 괜히 부끄러워서 참았다.


안 넣길 잘했지.

넣었으면 더 민망할 뻔했다.


똑 부러진 우리 신입은,

타 부서 사람들은 물론, 멘토인 나랑 해오던 식사도 안 하겠단다.

코로나 때문이란다.

- 솔직히 믿기진 않았다. 

세대차이인 건가?

MZ세대 신입을 꼰대인 내가 이해 못하는 건가?


어떻게 해야 하나?

내 딴에는 교육계획과 면담일지도 파일로 만들었는데,

얼굴을 안 보면 어떻게 멘토링을 한다는 말인가?


멘토 프로그램 담당자인 부서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니,

그냥 놔두라고 한다.

'나만 이리 진지한 건가?'




#2 그런데, 내가 멘티의 입장을 고려한 걸까?


멘토... 사전적 의미로는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을 지도하고 조언해 주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지 못한 것이 양심에 찔린다.

게다가 그 부서에 친한 선배가 잘 부탁한다고

따로 말까지 한 상황이라, 더 그랬다.


사실 그 신입은 자기 일 잘하고, 예의도 바른데,

그냥 모르는 사람과 밥 먹는 것만 불편한 걸 수도 있다.


회사는 일을 하러 모이는 곳이 맞다.

우리는 일을 하러 모인 거지만,

사람과 사람이 모이다 보니,

업무를 잘하기 위해서는,

인간관계를 잘 핸들링하는 것도 중요하다.


기왕이면 밥이라도 한번 먹은 사이가

협조를 구하기에도 편하고

부장이나, 직장 선배한테 깨질 때,

불편한 동료가 있을 때,

일은 맡았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하는 건지,

도저히 감이 안 잡힐 때,

누가 은근슬쩍 나에게 일을 넘기려고 할 때,

회사에 친한 데다 회사 사정을 잘 아는 선배가 있다면,

어떻게 처신하면 좋을지 물어보기도 편하다.


나에게는 20대 시절 그런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는 우연히도 나와 전 직장이 같았다.

내가 이곳으로 회사를 옮기자,

전 직장 선배가 자기 동기였던 이 선배에게

날 잘 부탁한다고 전화를 했다고 한다.

- 나는 나중에 그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였을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을 텐데

선배는 나를 많이 챙겼다.


내가 몸이 아프면,

"나 보면 예의 차리느라 네가 불편할까 봐...

아픈데 밥이라도 챙겨 먹어.

문고리에 걸어놨어."

그렇게 선배는 내가 살던 집 문고리에 먹을 것을 걸어두고,

전화만 줬었다.

3년을 같이 산 내 하우스메이트(#1~#4 그녀)조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3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이 글을 쓰면서, 반성이 되었다.

나는 역할을 부여받으면 반드시 해야 한다는

쓸데없는 사명감으로,

그 신입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는지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막연하게 그나마 내가 알고 있는 회사 사람들과 엮어주려 했을 뿐,

나는 '내 할 도리 다했다.'라고 마무리 짓고 싶었던 것 같다.




#4 책임감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 사이에서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불편하고 힘들긴 하다.

선배로서, 멘토로서, 정형화된 어떤 역할이 있는데,

내가 그걸 제대로 못한다는 죄책감이 든다.


그런 정형화된 모습이 꼭 답은 아닐 텐데 말이다.

그 신입이 수습이 끝나고 무사히 본채용이 되기를 바라지만,

혹시라도 안될 경우에 어떻게 면피할까?

이런 고민이,

그 후배를 도와주려는 마음보다 솔직히 더 컸던 건 아닐까?


회사에서 대인관계도 중요한데,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안 된다.


나도 모르게,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의 프레임을 가지고

신입 사원을 대한 게 아닌가 반성한다.


사실 아직 멘토링 기간이 남은 지금,

나는 아직 접근 방법을 못 찾았다.

어떤 마음인지 솔직하게 이야기해주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그건 그 사람의 선택일 것 같다.


--------


글을 쓰는 이 시점에서 나의 멘티는 그만두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회사나 일이 잘 맞지 않았던 것 같다.

같이 밥이나 먹자고 했는데, 일정을 조율하다 안 맞길래 다음 주에 먹자고 했다.


이번 주가 마지막이었다는데... 몰랐다.

차라리 다른 약속을 비울 것을


아쉬운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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