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로 다시 돌아온 남편의 가족들

독일인 남편과 결혼하니 러시아 가족이 생겼다.

by 비바제인

지난 6월 독일에 온 이후 처음으로 독일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남편이 내게 부고를 들려줄 때 간단히 말해주기를 혈연으로 이어진 사이는 아니지만, 독일에 이민 올 때 함께 온 가족 중 한 분이라고 하였다. 시어머님은 일찍 돌아가신 당신의 어머님을 대신해 독일에서 그분을 친엄마처럼 따랐다고 한다.


사람의 정신이 육체에 미치는 힘은 어디까지일까. 그분은 아흔을 몇 해 남기지 않은 연세에 지난 십 년간 병마와 싸우시다 요즘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하신 지가 얼마 안 돼 지난 6월 말 삶의 기나긴 여정을 마치신 것이다.


나는 생전에 그분을 만나보지 못했기에 부고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비슷한 연세에 세상을 떠났던 우리 증조할머니였다. 나에게 이유 없이 또 대가 없이 온전히 사랑만 주시고 가신 우리 증조할머니는 내가 나를 미워하는 날에도 마지막 방패가 되어주시던 분이었다. 그분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였을 것으로 생각하니 마음이 저릿해 왔다. 하루 먼저 장례식이 있는 도시로 하루 전날 먼저 떠난 시부모님을 뒤쫓아 남편의 누나 내외와 함께 차를 타고 우리가 사는 곳에서 세 시간 떨어진 어느 한 가톨릭 교회에 도착했다. 문상객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낡은 묘지에 비해 유난히 깨끗해 보이는 한 건물로 들어갔을 때 그분은 염을 모두 마치고 정갈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관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몇 해 전 찍었다는 사진보다 눈에 띄게 야위어진 모습이었다. 분명 조금만 일찍 만나 뵈었다면 환한 미소로 나를 안아주셨겠지, 러시아 말로 따듯한 말을 한 다발 안겨주시고는 서툰 나의 러시아어를 귀여워해 주셨을 텐데. 비록 나의 핏줄은 아니더라도 시어머님의 어머니 같은 분이라 하니, 알 수 없는 친밀감이 들었다.


두 시 정각에 시작한 장례미사는 가톨릭교회에서 이루어졌다. 미사가 끝나자 문상객들은 무리를 지어 마지막으로 관을 내리는 모습을 보기 위해 묘지에 모였다. 세시를 막 넘겼을 때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묘지에 울려 퍼지는 구슬픈 러시아 노랫가락이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렸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들려오는 울음이 섞인 노래는 곡소리보다 서글프게 들렸다. 장례를 주관한 신부의 마지막 기도가 끝나고 장의사로 보이는 사람이 관이 들린 작은 기중기의 버튼을 누르자 관이 내려갔다.


장례미사의 첫머리에 신부는 그녀를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그녀가 살아온 이야기를 잠시 들려주었다. 1930년대 2차 세계대전의 긴장감이 고조될 때 우크라이나의 독일인 마을에서 태어난 작은 여자아이는 사춘기가 채 시작도되기 전 다시 시베리아로 피난을 가야 했다. 날씨만큼이나 모든 게 혹독했던 그곳에서는 그녀는 아버지와 두 형제를 잃게 되었다. 그리고 아픔을 시베리아에 남겨두고 슬퍼할 새도 없이 그녀는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먼 길을 떠났다. 그새 아가씨가 된 그녀는 카자흐스탄에서 반려자를 만났고 가족을 이뤘다. 그러나 상황은 그녀를 쉬지 못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떠나게 된 곳 그리고 이 관이 내려진 곳은 독일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독일인이었고 늘 독일이 고향임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의 땅으로 돌아와서도 그녀는 그녀가 나고 자란 춥고 척박한 땅들, 그래서 소중했던 일상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관은 내려졌고 그녀는 이제 더는 가족을 잃지도 정든 곳을 떠나야 하는 일도 없이 안식을 찾게 되었다. 고단했던 삶의 마지막 여정을 그녀의 두 딸과 이제는 조그만 예배당이 가득 채워질 정도로 불어난 후손들이 지켜주었다. 나는 관 위로 장미꽃을 던지는 문상객 중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헌화 하고 다시 남편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지난여름 남편 가족의 장례식을 다녀온 경험은 나에게 강렬하게 기억되었다. 사실 남편과 돌아가신 할머니와는 우리가 보통 이해하는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은 아니지만, 힘든 시기 서로의 등대가 되어주었던 가족과 다름없는 사람의 장례식이었다. 나는 그때를 기억하며 종종 평생 여러 곳을 떠돌며 살아야 했던 운명은 어떤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어느 일요일 남편의 가족들과 시부모님의 집 정원에 앉아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나는 시아버님에게 왜 독일에 다시 이민을 오시게 되었냐고 여쭈어보았다. 시아버님은 아주 간단히 대답하셨다. "헬무트 콜 덕분이지, 러시아에 있는 독일인들은 그때 독일로 많이 돌아왔어."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의 세계정세는 굉장히 급변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당시 남편 가족들의 상황은 급변하는 세계정세와 상당히 많이 연관되어 있었다. 독일의 통일과 냉전 주의의 종식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이후 구소련으로 표기)로 인해, 서독으로 엄청나게 많은 수의 이민자들이 밀려오게 된다. 구소련시절, 동독에서 서독으로의 이민은 1945년부터 공식,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지만, 1970년대와 80년대를 지나면서는 국가의 강화된 제재로 감소하는 추세였다.

그림 1: 동독 지도부가 자국민의 국경 탈출 문제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다.

1989년 8월 5일: 동독 지도부는 동베를린, 부다페스트, 프라하 및 바르샤바에 있는 독일 연방 공화국(DDR)의 국경을 떠나려는 사람들에 대해 침묵을 유지했다. 처음으로 텔레비전 뉴스가 이것을 보도하게 된다.


그림 2: 베를린 장벽에 대한 시위

1989년 8월 13일 : 베를린 장벽 건설 28주년에 동베를린과 부다페스트의 시민활동가들은 베를린 장벽의 철거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사실상 독일의 통일이 눈앞으로 다가오게 되자, 당시 독일의 총리이던 헬무트 콜은 미샤엘 고르바초프와의 면담을 통해 구소련이 독일의 통일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뜻을 받아낸다. 그 후 소비에트 연방은 1992년 건국 69년을 앞두고 해체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1991년부터 구소련은 해체 순서를 밟고 있었기에 구소련 내의 러시아 독일인들은 국내외 정세를 지켜보며 숨죽이고 있었다. 사실 그들 중 모두가 독일로 돌아오기를 희망했던 것은 아니다, 일부는 남았고 일부는 구소련 붕괴 후 러시아의 다른 도시로 이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거인의 몰락은 그 내부의 시스템 붕괴를 함께 일으켰다. 구소련의 영토에 남은 사람들에게는 험난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1999년 독일에 이민 온 러시아 독일인 중 한 명인 타티아나 자우어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평온했던 어린 시절이 지나고 소련이 무너지자 “힘든 시간”이 뒤를 따랐습니다. 공장은 더는 돌아가지 않았고 가족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새로운 카자흐스탄 공화국에서는 카자흐어가 국어로 선언되었습니다."


"Den unbeschwerten Kindertagen folgten „schlimme Zeiten “, als die Sowjetunion zerfiel. Die Betriebe funktionierten nicht mehr. Die Familie habe unter Zukunftsängsten gelitten. In der neuen Republik Kasachstan wurde die kasachische Sprache zur Staatssprache erklärt. (...)“



남편의 가족들은 독일인의 핏줄을 가지고 있지만 이미 그 선조들이 러시아에 이민 온 후 200년이 넘은 시간이 지난 후였다. 이미 모든 가족은 러시아어로 의사소통을 했고, 독일어는 가족 내에서 잊혀 갔었다. 종종 러시아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경우는 있었어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러시아의 문화에 적응하고 동화되어 갔었다. 가족 중 몇몇은 전문적인 교육을 받기도 해서 남편의 할머니와 큰아버지는 카자흐스탄에서는 수의사로 일을 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독일로 돌아오게 된 경우는 구소련의 해체와 함께 폭락해버린 루블화의 운명과 함께 어려워진 경제 상황에서 순전히 더는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어서였다고 한다.


담담한 어투로 그는 나에게 새삼 현재 독일로 몰려든 피난민들의 상황을 빗대어 설명했다. 그는 이야기하기를, 자신들도 처음에는 그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야 했다고 한다. 해체된 구소련에서 온 러시아 독일인 외에도 통일된 독일에는 이미 동독에서 서독으로 밀려오는 피난민들의 물결이 범람하고 있었다. 남편의 가족들은 1992년 독일로 돌아왔다. 그때 남편의 나이는 5살이었고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한다.


"어머니 쪽은 양친이 이미 돌아가신 후였고 어머니의 하나뿐인 남자 형제 또한 일찍 세상을 뜬 후였대. 우리 가족은 아버지 쪽 가족들과 카자흐스탄에서 가까이 지냈던 한 가족들과 함께 독일로 가기로 했었다고 해. 나는 당시 매우 어렸기에 이런 이야기들은 나중에 들었어. 다만 내가 기억하는 건, 우리가 독일로 떠나기 며칠 전 마을에서 크게 환송회가 열렸다는 거였어. 이웃들은 우리에게 독일에서의 더 나은 삶을 축복해 주었고, 행운을 빌어주었지. 나는 그날 그저 평소보다 먹을 것이 더 많다는 게 기뻤었어."

독일로 온 후 남편의 가족들과 일행들은 처음 이 년 동안은 피난민들을 위해 마련된 난민 캠프를 전전하며 생활해야 했다. 낯선 곳에서의 불안정한 생활이었으나, 모두가 함께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2년 만에 남편의 가족들은 한 다세대 주택의 여러 플랫을 임대해서 함께 모여 살게 되었다. 드디어 독일에 둥지를 틀게 되자 그들은 그 후로 생계를 꾸리기 위해 그저 열심히 일했다. 국가에서 원조해주긴 했으나, 충분하지는 않았고 절약은 그들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가족 중 가장 어린 나이였던 남편의 기억은 어른들의 기억과는 사뭇 달랐다. 그저 그는 부모님이 유독 절약을 하셨고 본인이 사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못 살 뿐이었지만, 그건 자신에게 특별한 일이 아니었기에 별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부모님은 늘 일을 하러 가시는 바람에 집에는 늘 네 살 많은 누나와 함께 있었는데, 윗집 아랫집 옆집이 모두 가족들이라 또래의 사촌들과 시도 때도 없이 놀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한다. 그리고 부모님이 안 계실 때는 가족 중 다른 어른들이 밥을 차려주거나 그들 또한 시간이 없을 때는 마음대로 텔레비전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한다.


다소 철이 없어 보이는 이야기지만, 사실 그는 아직 아이였고 철이 없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이민 온 후 많게는 하루에 세 가지의 일을 했다고 한다. 화물트럭을 운전하는 일을 했던 시아버님은 일하러 가면 보통은 15시간 정도를 내리 운전해야 했었고, 육아와 살림은 모두 어머님의 몫이었다. 게다가 남편의 급여로는 네 식구의 생활비를 충당하기에 충분치 않았기에 어머님 또한 일해야 했었다고 하셨다. 카자흐스탄에서 주부로 살던 여자가 독일어도 잘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님은 오전에는 세 시간 정도 사무실에서 청소 일을 했고, 집에 잠시 돌아와서는 아이들의 점심밥을 차리고는 바로 택배 일을 하러 가셨다고 했다. 택배 일이 끝나고 어머님이 향하신 곳은 다른 식품업체였다고. 나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저 그녀가 자동차나 자전거를 타고 택배를 배달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했던 일은 택배 승하차 일이었다. 30대 작은 체구의 여성의 몸으로 하기에는 엄청나게 고된 일이었지만, 다른 일들에 비해 급여가 월등히 좋았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버님은 건강상의 이유로 어머님이 택배 승하차 일을 하는 것을 굉장히 반대했지만, 그녀는 일 년가량 그 일을 이어갔다.




시어머님은 성격이 아주 쾌활하고 유머가 있으시며 손님들이 오면 아낌없이 내어주실 줄 알며, 늘 집안을 깨끗하게 정돈해 놓으신다. 나는 이제껏 남편 부모님의 집보다 깨끗한 집을 본적이었다. 어느 다른 집이나 심지어 호텔 방을 포함해서도 말이다. 우리 부부가 예고 없이 집을 방문할 때에도, 찬장이나 집안 그 어느 곳에서도 먼지 한 톨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식탁에는 늘 가족들이 언제나 먹을 수 있게 음식이나 과일들이 놓여 있다.


남편의 아버님은 어머님과 마찬가지로 유머러스한 성격에 호탕한 웃음을 갖으신 분이다. 책을 좋아하시는데 이제는 안 좋아진 시력 때문에 주로 이어폰으로 오디오북을 즐겨 들으신다. 아버님은 손재주가 좋으셔서 화물택배기사를 그만두시고 나서는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가죽시트를 만드시는 일을 해 오셨다. 시부모님의 근면함은 독일에서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게 해 주었다. 30평가량의 이층집에 카포트와 집의 크기만 한 정원이 딸린 아주 정갈한 집을 그들은 십 년 전에 구입했다. 집은 살 때는 수리가 필요한 상태였지만, 아버님과 어머님이 손수 집안의 벽지, 타일, 장판까지 손수 수리를 하시며 지금의 아늑한 집을 꾸리셨다.


남편의 꾸밈없고 구김살 없는 성격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으셨던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했다. 남편은 그 어떤 누구와도 쉽게 교제할 수 있는 열린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는 자신이 다른 평범한 과거를 갖은 다른 또래들보다 많은 것을 경험했기에 웬만한 일에는 쉽게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남편을 만날 당시 나는 멘탈이 튼튼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를 만나고 나서는, 그의 태양 같은 구김살 없는 성격은 나의 유리성 같던 정신 상태를 튼튼한 벽돌집으로 변모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물론 아직도 매일 벽돌을 굽는 중이기는 하다, 언젠가 완공될 날을 기다리며). 남편도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는 나이가 되자,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었다. 지금은 대기업의 IT 부서에서 개발자로 일하며 안정적인 수입을 벌게 되었지만, 그는 어릴 적에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고 한다.


독일에서 살게 된 것도 벌써 6년이 되었다. 지금은 타지에서도 비교적 안정된 시간을 보내게 되었지만 초반 몇 년은 낯선 땅에서 낯선 이들 사이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매일같이 마주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고국에서 8.415 km나 떨어진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그 가족들의 도움이 컸다. 엄마의 집밥이 그리울 때면 시어머니의 집밥을 먹으며 버텼고, 아버지의 빈자리는 무한한 시아버지의 사랑으로 채워졌었다. 남편의 가족들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한국의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두 편에 걸쳐서 남편의 가족 이야기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일화들은 남편을 알게 되면서 독일에서의 러시아 독일인으로 사는 가족들과 인연을 맺고 나서 알게 된 것들이다. 남편의 가족을 통해 나는 독일이라는 나라의 어쩌면 조금 색다른 구성원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 독일에 교환학생으로 왔을 때는 나는 독일과 독일인들에 대해 한국의 매체와 공교육에서 얻을 수 있는 한정적인 정보들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에 와서 스스로 이방인으로서 살아오게 되니, 독일의 다른 모습들과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은 나의 선입견과 사고의 지평선을 조금을 넓혀 주었다. 나의 지난 두 편의 글과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들이, 사람들이 독일이라는 나라와 그 구성원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여줄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참고자료:

1. 위키피디아 - 헬무트 콜: https://ko.wikipedia.org/wiki/%ED%97%AC%EB%AC%B4%ED%8A%B8_%EC%BD%9C

2. 러시아 독일인 타티아나 자우어 씨의 인터뷰(독일어): https://www.ekiba.de/html/aktuell/aktuell_u.html?&m=31&artikel=12146&cataktuell=331

3. 고향에서 고향으로(Von Heimat zu Heimat), Zeit 잡지사의 기획 기사(독일어): https://www.zeit.de/zeit-geschichte/2015/03/russlanddeutsche-auswandern-erster-weltkrieg-perestroika/seite-2?utm_referrer=https%3A%2F%2Fwww.google.com%2F

4. 나무 위키 - 소련 해체: https://namu.wiki/w/%EC%86%8C%EB%A0%A8%20%ED%95%B4%EC%B2%B4

5. 위키피디아 - 소련과 동독으로부터의 탈출(독일어): https://de.wikipedia.org/wiki/Flucht_aus_der_Sowjetischen_Besatzungszone_und_der_DDR



그림 출처:

표지 사진: Tag Eins nach dem Mauerfall - Bildquelle:Bundesregierung/Lehnartz

1. DDR gesteht Fluchtproblem öffentlich ein - Bildquelle: Alliance/AP

2. Protest gegen die Mauer - Bildquelle: Alliance/Christian Schul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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