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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Feb 08. 2021

L - Lichtbild (증명사진)

EP. 12

L - Lichtbild (증명사진)



 한여름 뜨겁게 내리쬐던 햇빛의 기세가 줄어들고 하루의 길이가 다시 슬며시 짧아지는 8,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그 사이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우체통을 살피는 은 나의 일상이 어있었. 떨리는 손으로 뜯어본   통의 우편물 안에는 모두 합격의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면접을 봤던 뒤셀도르프와 쾰른에 있는 대학교들은 물론, 지원했던 비스바덴의 학교에서도 좋은 소식을 전해준 것이었다.  곳이라도 붙었으면 했던 간절한 바람은 이제    입학할 학교를 선택해야 하는 행복한 고민으로 바뀌었다.


고민 1. 이제야 익숙해진 비스바덴을 떠나 다시 아무런 연고도 없는 도시에 가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것인가, 혹은 비스바덴에 남을 것인가

고민 2. 추후 취업할 때를 생각해서 디자인 언론 경영을 공부할 것인지 아니면 꿈으로만 남겨졌던 사진 공부를 할 것인가


등록금 납부일까지 며칠간 고민은 이어졌다. 고민하는 동안 머릿속에는  가지 얼굴들이 지나갔다.     비스바덴에 있는 회사에 취직한 남자 친구, 가방끈이 길어지는 동안  믿어주시는 부모님의 얼굴이 하루에도  번씩 어른거리곤 했다. 그들의 얼굴들이 상상 속에서 형상이 되고 다시 점이 되어 사라질 무렵, 나는 등록금 납부를 마쳤다. 등록금의 납부처는 교환학생으로 왔던 비스바덴 학교 디자인, 미디어 경영 대학원이었다.




 2013 늦여름 마지막 과제를 제출하고 학교를 떠났으니, 2016 가을의 방문은    만이었다. 학교는 그동안,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변한 것이 없었다. 6 버스의 종착지이기도  북쪽 묘지(Nordfriedhof) 정류장에 내리면 오른쪽에는 유치원이, 정면에는 숲으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펼쳐진다. 그곳에서 왼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내가 다녔던 그리고 앞으로 다니게  캠퍼스가 나온다. 초행길인 사람에게도 캠퍼스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저 같은 버스에서 내린 학생들의 뒤꽁무니를 쫓아가면 되기 때문이다. 캠퍼스에 들어서면 오른쪽엔 작은 들판과 낡은 그네가 걸려있는 나무가 호젓이  있다. 나무는   동안 전혀 자라지 않은 듯했고, 낡은 그네도 그대로였다. 캠퍼스  듬성듬성  있는 광고 기둥(Litfaßsäule) 변함이 없었지만,  안의 내용만 현재 진행 중인 시각디자인 학과의 특별 전시회를 알리는 포스터로 바뀌어 있었다. 시내 외곽에 있는 캠퍼스는 숲의 초입에 지어진 만큼, 사방이 나무로 둘러싸여 있었다. 낙엽이 지기 시작한 캠퍼스의 적막한 모습은 초현실주의 작가 조르지오  치리코(Giorgio de Chirico) 그림  풍경처럼 어딘가 적막하고 쓸쓸해 보였다.


그리고 그 익숙한 듯 낯선 캠퍼를 나는 검은색 티셔츠에, 어두운 스키니 청바지와 한국에서 가져온 옷 중 가장 단정한 검은색 모직 재킷을 걸치고 홀로 걷고 있었다. 어젯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알맞은 옷을 남자 친구에게 검토받은 후 골라 입은 옷이었다. 사실 남자 친구는 한참 동안 옷을 고르는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제인, 도대체 옷에 왜 그렇게 신경을 쓰는 거야. 정해진 규칙 같은 거는 없어, 그저 입고 싶은 대로 입으면 돼!"

"아니 그래도 T.P.O(Time, Place, Occasion 약자로 시기, 장소, 상황에 맞는 옷차림을 의미한다)라는  있는 거잖아? 면접 때 내가 얼마나 창피했는데!"


그렇게 한참을 실랑이하며 옷을 고른 이유는 그저 멀끔한 모습으로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하려던 것뿐만은 아니었다. 어학원을 벗어나 처음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기에 앞서 나는 한껏 긴장해있었기 때문이다. 굳은 어깨로 들어선 곳은 예전 교환학생 시절 쓰던   건물이었다. 사층짜리 건물은 미디어와 컴퓨터 과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함께 쓰는 곳으로 1층은 주로 대형 강당과 행정을 담당하는 사무실이 들어서 있었고, 2층에는 컴퓨터 과학부 학생들의 강의실이 그리고 3층에는 앞으로 내가 공부하게  미디어 학부 대학생과 대학원생들을 위한 강의실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4층에는 교수들의 연구실이 있었다. 조심스레 계단을 올라 3층에 도착하자, 복도 전체는 개강을 앞둔 학생들과 나처럼 새로 입학한 학생들의 들뜬 분위기로 가득  있었다.  부산스러움에 나의 긴장도 점차 고조되어 마치 눈뜬장님처럼 강의실  앞의 안내문도 제대로  읽을 지경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잠시 잘못된 강의실로 들어섰는데, 그곳에서 교수로 보이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이곳이 디자인 미디어 경영 대학원 오리엔테이션 장이 맞냐고 물으니, 그는 마치 내가 수수께끼라도  것처럼 아무 대답도 없이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그는 어딘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하고는 말했다.


"자네가 디자인 언론 경영 대학원 신입생이라고? 흠... 그렇다면 다른 강의실로 가야 하네. 밖으로 나가서 정면에 보이는 큰 강의실로 들어가게나."


그가 어찌나 빠른 목소리로 말하던지, 나는 그의 말을 반도  알아들었지만 일단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궁지에 몰린 생쥐처럼 도망치듯 다른 강의실로 향했다. 그가 알려준 강의실은 3층에 위치한 강의실  가장  강의실이었고,  안에는 벌써 몇몇 학생들이 상기된 얼굴로 앉아있었다. 가장자리의 테이블에는 마치 남매처럼 닮은 금발의 학생  명이 앉아있었는데  둘은 모두 안경을 쓰고 있었다. 함께 앉아도 되냐고 물으니 그들은 독일인 특유의 예의를 갖춘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답했다. 그렇게 함께 앉은 우리 셋은 대화를 트기 위해 잠시 서로 자기소개를 했는데,  둘은   마디에 벌써 공통점을 찾은 듯했다.


"아, 너 그 도시에서 왔어? 내 친구도 거기서 대학교를 나왔어!"


그렇게 그들이 대화의 물꼬를 트고 활기를 띠기 시작했을 무렵, 나의 존재는 점차 잊혀 가는 듯했다. 혹시나 나도 나와 공통점이 있을 만한 사람이 있을까 해서 둘러보니, 다른 테이블에 앉은 학생들도 이미 각자 대화 상대를 찾아가고 있었다. 강의실 학생들 가득 채워지고, 시계가  환영식의 시작될 시간을 가리키자 여섯 명의 교수진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강의실 문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교수   사람이 학생들에게 정숙해줄 것을 요구했고, 강의실에 모인 모든 사람은 이내 대화를 중지하고 그를 향해 관심을 기울였다. 강의실이 조용해지자, 그는 자신이 우리의 석사 프로그램을 관리하며 교수회의 부회장 자리를 맡고 있다며 스스로를 소개했다. 그는 러시아 억양을 제외하고는 완벽한 고급 독일어(Hochdeutsch) 구사했는데, 정교수라고 하기에는 젊은 축에 속해 보였다. 나중에 알게  바로는 그는 러시아에서 수학을 시작해 독일에서 교수직을 얻게 되었고 이미 수많은 논문과 저작을 가지고 있는 능력 있는 교수였다. 그에 이어 다른 교수들도 돌아가며 짧게 맡게  과목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그중에는 나에게 강의실을 알려주었던 교수도 있었다. 교수가 강의실의 학생들을 둘러보는 동안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교수들의 자기소개가 끝나자 학생들의 차례가 왔다. 마흔 명이 조금  되는 학생들은 각자의 성격과 개성에 맞춰, 몇몇은 자랑스럽게  다른 몇몇은 수줍어하며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겉으로는 다른 학생들의 자기소개를 의연하게 듣고 있었지만, 심장은 나와는 다른 자아를 가진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기소개하는 동안 나의 불안이 확신이 되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로 강의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많은 학생 중 '독일어를 모국어로 갖지 않은 사람'은 나뿐이라는 것이었다. 내 차례가 돌아왔고, 나는 침착하게 짧은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하지만 나의 목소리는 넓은 강의실을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장난기가 많고 활발한 성격을 갖은 한 남학생이 나를 향해 웃으며 소리쳤다. "헤이! 잘 안 들려. 더 크게 말해달라고!" 내심 당황했지만, 그의 외침을 웃음으로 넘기고 다시 목청을 가다듬고 조금 더 큰 소리로 다시 자기소개를 이어갔다. 한국에서 디자인을 공부했고 앞으로 함께 공부하게 되어서 기쁘다고, 아직 완벽한 독일어를 구사하지는 못하지만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나의 자기소개는 넓은 강의실을 울렸고 그 메아리는 환영의 박수로 돌아왔다. 개중에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관찰하는 학생도 있었고 온화한 미소로 긴장한 나를 반겨주는 학생들도 있었다.


 후로 이어진 석사 프로그램에 대한 간단한 소개 그리고 앞으로 나오게  시간표, 학교 포털시스템에 대한 안내를 끝으로 교수들은 자리를 떴다. 강의실에 남은 같은 학부의 선배들우리를  강의실로 안내했다. 이동해  강의실에는 학생 DB(Data Base) 위한 사진 촬영을 위해 이미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호명되는 순서에 따라  명씩 카메라 앞으로 불려 갔다.  차례가 되어 카메라 앞에 서자, 촬영을 담당한 학생이 셔터를   누르더니, 카메라 액정에서 나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조금 웃어볼래요? 앞으로 이 년 동안 남게 될 사진이니까요"


곱슬머리에 작은 키를 갖은 그녀는 소탈한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친절하게 렌즈를 향해 웃어 보일 것을 요구했다. 그녀의 환한 미소에 답하듯 나는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한 주가 흐르고 다시 찾은 강의실에는 신입생 모두의 사진이 인쇄되어 걸려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위치한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색 눈동자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나의 사진은, 흰쌀밥에 튄 간장처럼 다른 학생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애써 지은 미소가 무색하게 눈빛에는 긴장과 불안함을 가득 머금고 말이다.




글: vivaJain - https://brunch.co.kr/@vivajain

그림: Soorimm - https://www.instagram.com/soorimmki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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