ß(에스체트)를 위한 찬가
#1
ß 는 어렴풋이 보면 필기체로 흘려 쓴 대문자 B 또는 그리스어의 두 번째 알파벳인 베타(β)를 연상시킨다. 이 독특하게 생긴 독일어 알파벳 ß 는 에스체트(Eszett)라고 불린다. 독일어 구어로는 도플 에스(Doppel-S) 또는 재미있게 룩삭에스(Rucksack-S - 배낭을 멘 S)라고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별명을 갖은 에스체트는 대부분 S를 길게 소리 낼 때 상용되지만 때로는 S 두 개를 연달아 소리 내어 마치 우리말 된소리인 ‘쓰’처럼 발음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상 에스체트로 시작되는 독일어 단어는 없다. 에스체트는 모두 단어의 어미에만 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 쪽이 넘는 독일어 사전을 펼쳐보아도 에스체트를 위한 페이지는 한쪽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1974년도부터는 공식적으로 에스체트를 쓰지 않기로 합의했고 2006년도부터는 지명 등 행정상 공식적으로 사용이 중지되고 SS로 대체해 사용된다고 한다. 그리하여 독일어로 쓰인 최신 출판물에서도 이전에는 ß가 있던 자리는 거의 대부분 ‘SS’가 대신하게 되었다.
<나의 독일 ABC>의 마지막을 독일어 공식 사전에도 없는 ß로 마무리하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다. 독일어를 처음 배울 때부터 나는 어쩐지 ß가 마음에 들었다. 생전 처음 보는 알파벳으로는 세 개의 움라우트 알파벳도(Ö, Ä, Ü) 있었지만, 에스체트는 그 생김새가 어쩐지 유난히 흥미롭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발음하기 어려운 움라우트 알파벳들에 비해 된소리 발음에 익숙한 한국인인 나에게 에스체트는 더 정감이 가기도 했다. 필기할 때 직접 손으로 에스체트를 쓸 때면(사실 처음에는 그렸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낯선 언어를 새로 배우는구나 싶은 느낌에 홀로 우쭐해하기도 했다.
힘겨웠던 독일어 공부와 석사 과정을 모두 끝내고도 이제 2년이 흘렀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가끔은 스스로가 애잔하게 느껴지는 기억들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등하굣길 버스에서 만나게 될 같은 반 학생들과의 가벼운 잡담도 힘겨운 날에는 나는 도보로 삼십 분이나 걸리는 거리를 걸어서 집으로 가기도 했고, 답을 알고 있음에도 서툰 독일어 발음 때문에 입을 떼기가 싫었던 때에는 질문을 하는 교수의 눈빛을 피해 허공을 바라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점차 독일어 생활이 길어지면서 나는 이제 에스체트도 유려한 필체로 손쉽게 쓸 수 있게 되었고 일상에서 독일어를 쓰고 말하는데 거의 문제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독일어를 이곳 사람들처럼 자유롭게 쓸 때가 되면 이 길고 길었던 ‘Immigrationsprozess(이민 적응 절차)’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커다란 착각이었다. 나는 이름, 생김새 그리고 억양 모두에서 숨길 수없는 완연한 한국인이었다. 마트의 계산원, 버스의 운전기사 그리고 회사의 면접관에게도 나는 낯선 존재였다. 용기를 내어 입을 열어 독일어 단어들로 무장 해제시키려 노력해 보아도 그들은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살폈고, 나는 독일인이었다면 받지 않았을 질문들을 견뎌야만 했다. 2014년 독일에 온 후 이제 독일 생활 7년 차가 되었음에도 나는 이곳에서 이방인이었다. 마치 독일어 알파벳이지만 사전에는 없는 에스체트처럼 나는 독일에 있지만 독일에서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2
하지만 나는 독일이 좋다. 그리고 앞으로도 독일에 머물고 싶다. 가장 큰 이유로는 독일 사람들의 ‘개인주의’가 있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강박적 정체성을 갖은 사람들의 나라에서 나는 늘 가면을 쓰고 있어야만 했다. 초. 중. 고 시절을 모두 한 지역에서 보내다 대학 입학과 함께 나의 작은 우물을 떠나야 했을 때 나에겐 실히 지각변동 같은 것이 일어났다. ‘아니 이 조그만 땅덩어리에도 이렇게 다양하게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니!’ 내가 살던 곳도 그리 작은 지역은 아니었지만, 전국에서 서울로 모여든 학생들에 비하면 학창 시절 친구들과 동네에서 유명한 양아치들은 그저 '도긴개긴’이었다. 그리고 전국에서 모여든 다양한 괴짜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수단은 대학의 전체주의였다. 신입생들은 선배들의 말을 잘 듣지 않으면 간간히 소집을 당했고, 신입생 환영회 때 자기 주량을 훌쩍 넘기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곧바로 눈밖에 나곤 했다. 그러나 나는 그때도 아직 내가 ‘개인주의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사실 나는 밖에서는 아웃사이더가 되기 싫어 괜스레 밝은 척을 한껏 하곤 했었다. 괜스레 ‘사회성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혀 무리에서 도태되는 것보다는 가면을 쓰고 사는 것이 훨씬 견딜만했기 때문이다. 도저히 내 기준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과 한 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로 겪어내야 했던 일들이 나에게는 유난히 다른 사람들보다 힘들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저 나의 부족한 ‘사회성’때문이라고만 생각했기에 시간이 나면 어떻게든 나의 단점을 바꿔보고자 서점의 자기 계발 서적 코너를 황망히 서성이곤 했다. 개인보다는 집단이, 소수보다는 다수의 의견과 결정이 더 옳다고 여겨지는 곳에서는 스스로를 바꿔야 했다. 미국 헌법의 기초 토대가 된 존 로크(John Locke)도 자신의 유명한 서적 통치론(Über die Regierung)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Die Frage, wie man denn vor Schaden und Unrecht von seiten der stärksten Hand, aus der man es empfangen kann, geschützt werden könne, gilt unverzüglich als die Stimme des Aufruhrs und der Rebellion.(강자에 의해서 발생하는 손해와 부정의로 인해 입을 수 있는 것에 있어 개인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바로 분쟁과 반항의 목소리로 여겨진다.)” 괜히 바른 소리를 해서 집단에서 제외되느니 강자의 편해 서는 것을 권했던 나의 조국에서 나는 결국 순응적인 겁쟁이가 되어있었다.
독일 이야기에 로크까지 끌어들여서 복잡하게 들리지만, 짧게 말하면 독일 사람들의 생활 속에 짙게 정립된 ‘합리적 자유주의’가 내가 독일에 머물고자 하는 큰 이유라는 것이다. 흔히 서구 문화권이라 불리는 국가에서는 19세기 초부터 ‘자유란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 그리고 ‘개인이란 무엇인가’ 등의 질문들이 활발히 토론되어왔다. 물론 서구 선진국가들이 과거에 저지른 반인류적인 행태와 현재의 역 민주적인 모습을 보았을 때 이것이 그 치열한 토론의 결과로 보기에는 실망스러운 모습들도 많다. 그러나 뉴스의 헤드라인이나 SNS의 토막 기사 등에서 보이는 자극적이고 단편적인 소식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장 평범하고 소소한 곳에서 진정한 국가의 분위기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회의에 빠져 자기 계발 서적 사이를 방황할 때, 독려와 다그침 사이의 글들 중에서도 흙속의 진주처럼 얻게 된 교훈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위대한 사람의 위대함은 평범한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렇다, 나와 같은 고민을 했었다면 한 번쯤은 보았을 데일리 카네기의 글이다. 국가에 대입하면 ‘위대한 국가의 위대함은 서민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라고 할 수 있겠다.
독일의 사회보장 제도는 평범한 사람들이 근면하게 생활하면 일과가 끝난 후 편히 몸을 누일 수 있는 지붕과 영양가 있는 식사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독일 국민뿐만 아니라, 2014년부터 지중해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독일로 밀려온 난민들도 독일 국가 또는 지방 정부에서 독일어 교육을 받고 일자리를 찾아 자립할 수 있는 지원을 이어오고 있다. 독일은 통계적으로 2015년부터 120만 명의 난민을 수용했으며, 신청자의 3분의 2를 난민으로 인정해주고 수용했다고 한다. 물론 정치적으로는 난민 수용에 대한 찬반으로 한동안 여론이 시끄러웠지만 그것은 외부인을 수용하는 데 있어 겪어야만 하는 필수적인 갈등으로 보인다. 2016년 제주도에서는 예멘에서 내전을 피해 온 난민 561명의 난민 신청만으로도 한반도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결국 그중 지금까지 단 네 명만이 난민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2019년 대한민국의 난민 수용률은 0.4%에 그친다.
앞 단락에서 아직도 독일은 동양에서 온 외국인인 나를 받아들여주지 않으며, 나는 이 사회에 속할 수 없는 기분을 받는다며 어리광을 늘어놓았지만, 독일이 이 평범한 외국인에게 준 기회 또한 이야기해야 공평할 것이다. 조건만 충족하면, 나는 차별 없이 독일 학생들과 동등하게 독일 정부가 교육복지를 위해 정립해 놓은 낮은 등록금을 내고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나의 등록금은 한 학기에 300유로가 채 되지 않았다. 한국 돈으로 따지면 사십만 원이 조금 넘는 금액이다. 이 돈은 사실 수업 비라기보단 주로 교통비와 학생회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학생증만 있으면 나는 대학교가 속한 주의 고속 기차를 제외한 모든 교통을 공짜로 이용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독일 대학에 등록된 학생들은 극장, 미술관, 영화관 등 문화. 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통신비, 차량 대여 등에서도 금액 할인을 받을 수 있다. ‘학생’이라는 카테고리에 속하자 ‘외국인’이라는 나의 아이덴티티는 급격히 희석되었다.
그 외에도 독일어를 비교적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을 때가 되자, 나는 나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다. 독일 생활 초반에는 나의 낯선 외모 때문인지 어눌한 독일어때문인지는 몰라도 다른 손님들에게는 공평하게 인사를 하던 마트 계산원이 나에게는 인사를 생략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처음에는 이것이 오만하고 무지한 ‘서유럽’ 사람들의 인종차별의 대표적인 모습이라며 몇 날 며칠을 분개하곤 했다. 그 당시엔 길에서 인사를 하지 않는 이웃한테도 마음속 증오를 품을 만큼 소인배적 기질과 방어적 공격성으로 똘똘 뭉쳐있을 때였다. 안 그래도 힘든 외국생활에 불친절한 사람들을 만날 때면 나는 마음속으로 칼을 갈곤 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속으로 이곳 사람들과 환경을 미워하다 보니 나의 독일어는 나날이 늘어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만큼 나도 조금은 어른이 되었다. 그들은 아마도 기어들어가듯 소곤거리는 나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수도 있고, 익숙지 않은 외국인을 보고 당황했을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완벽하지 않고 모두가 그렇듯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아직도 또박또박 독일어를 이야기를 하는 나의 인사를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사람도 불친절한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다. 나는 나대로 친절하고 여유로운 태도를 지키면 될 일이다. 그렇다고 모든 부당한 일들을 부처처럼 삭히며 지내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대로 목소리를 높이며 나의 권리를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가끔 나는 나의 고향에서 만약 내가 외국인으로 살게 된다면 어땠을까 싶다. 과연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나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을까? 최근에는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미국 출신의 방송인 타일러 라쉬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입장 차별을 당했다고 전했다. 타지에서도 참으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3
“이기적이고, 자신밖에 모르며 공동의 이익을 무시하는 것이 결코 ‘개인주의’가 아니다.” 서울 중앙 지방법원 부장판사이자 글 쓰는 판사로도 잘 알려진 문유석 작가는 자신의 저서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스스로 개인주의자임을 비로소 깨달은 것도 그의 서적을 통해서 이다. 그의 말을 조금 더 인용해 보도록 하자. “여기서 말하는 개인주의란 유아적인 이기주의나 사회를 거부하는 고립주의가 아니다. 개인주의는 근대 계몽주의, 합리주의와 함께 발전하며 서구사회의 근간을 형성했다. 합리적 개인주의자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이루어 살 수밖에 없고, 그것이 개인의 행복 추구에 필수적임을 이해한다. 그렇기에 사회에는 공정한 규칙이 필요하고, 자신의 자유가 일정 부분 제약될 수 있음을 수긍하고, 더 나아가 다른 입장의 사람들과 타협할 줄 알며, 개인의 힘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들과 연대한다.”
신이 아닌 인간과 그들이 이루고 있는 사회는 동물과 별다를 바 없이 본성과 습관이 그들 행동의 주를 이룬다. 하지만 인간이 지금처럼 실수와 과오를 범하면서도 커다란 사회를 유지하고 약자들을 보호하는 법률과 규칙을 이룰 수 있는 데는 인간의 ‘이성’ 그리고 ‘관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성으로 이해하고,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관용으로 감싸며 자신의 자유를 일부 제한하면서도 개인의 행복 추구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내가 이해하는 ‘개인주의’이다. 강자만을 위한 규칙은 필요 없다. 강자를 위한 사회와 규칙은 바로 ‘정글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그곳에는 약육강식이라는 단 하나의 구호가 있을 뿐이다. 존 로크는 <통치론>에서 이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Denn der Begriff Gesetz bedeutet im Eigentlichen nicht so sehr die Beschränkung, sondern vielmehr die Leitung des frei und einsichtig Handelnden in seinem eigenen Interesse, und seie Vorschriften reichen nicht weiter, als sie dem allgemeinen Wohl derer, die ihm unterstehen, dienen.(법이라는 용어는 실제로는 제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자유롭고 현명하게 지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법의 규정은 전체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 이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 “So ist das Ziel des Gesetzes, mag es auch mißverstanden werden, nicht, die Freiheit abzuschaffen oder einzuschränken, sondern sie zu erhalten und zu erweitern. Denn bei allen Geschöpfen, die zu Gesetzen fähig sind, gilt: Gibt es kein Gesetz, so gibt es auch keine Freiheit.(그리하여 종종 잘 못 이해되는 경우가 있지만, 법의 목적은 자유를 폐지하거나 제한하는 것이 아닌 자유를 지키고 확장하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법을 만들고 지킬 수 있는 모든 생물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것이 있다: 법이 없으면 자유도 없다.)”
분명 한 사회의 구성원이지만 모습과 생활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ß들이 사회와 그 구성원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위대한 국가가 아닐까. 만국의 ß들이 차별당하지 않고 눈물 흘리지 않을 그날을 위하여 나는 내가 서있는 곳에서 노력할 것이다. 독일, 한국뿐만 아니라 이 광활한 우주의 티끌만 한 한 행성에서 남들과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ß들이 조금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림: Soorimm - https://www.instagram.com/soorimmkim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