Ü - Überraschung (놀라움)
맞아, 내가(네가) 외국인이었지?
#1
앞의 글을 본 독자라면 알 수 있듯, 나의 남편은 독일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편의 먼 조상이 250여 년 전 예카테리나 여제가 러시아 제국을 통치하던 시절 펼친 이주정책을 통해 러시아로 넘어갔고, 다시 1990년대 초 남편의 부모님이 동독이 붕괴되고 독일이 통일을 하게 되면서 다시 독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매거진 <물티쿨티 독일 생활> 참고). 그리하여 남편은 어린 나이에 독일에 이주해 정착해 살면서 완벽한 독일어를 구사하는 어엿한 독일인이 된 것이다. 나와 남편은 둘 다 가진 것 하나 없는 학생 시절 비스바덴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학생 기숙사에서 만나게 되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나는 남편이 살고 있는 플랫 안 바로 옆방에 배정을 받게 되었고, 남편과 나는 서로 음식도 해 먹고 밤늦게 영화도 보고 하다 보니 어느새 연인이 되어있었다. 말 그대로 외국인이 우글우글거리던 기숙사에서 내가 남편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그가 여느 외국인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어린아이들끼리도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지 않는다는 독일인들과 달리 그는 첫 만남에서부터 선뜻 음식을 나누었고,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는 거리낌 없이 내가 남긴 음식을 먹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건 다 핑계다. 나는 첫 만남 남편의 환하고 순박한 미소를 보았을 때부터 그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낡은 기숙사 부엌을 환하게 밝히던 그 미소는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장거리 연애 1년을 포함한 도합 6년간의 연애를 무사히 마치고 현재 결혼 3년 차 부부가 되었다. 우여곡절 없는 연애가 세상에 어디 있겠냐만 나와 남편은 비교적 순탄하게 지난 8년이라는 시간을 잘 보내왔다. 우리가 결혼을 한 것도 사실은 결혼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어차피 앞으로 서로 평생을 같이 있을 거면 법적으로 맺어지면 함께 사는데 편리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은 남편이 자신의 생일에 기습적으로 한 프로퍼즈가 도화선 역할을 하긴 했다. 남편은 그 해 여름 자신의 친구들과 그리스로 일주일간 여행을 다녀왔는데, 여행을 떠나기 전 설렘과는 달리 오랜만에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그리 즐겁지도 않고 오직 내 생각만 났다고 했다. 그때 그는 그렇게 나와의 결혼을 결심했다고. 이제 한 달 뒤면 우리는 세 번째 결혼기념일을 맞는다. 달력에 빨갛게 쳐진 동그라미를 보며, 결혼한 지 벌써 그렇게 됐나 싶은 마음이 드는 걸 보니 우리의 결혼생활은 지금까지 아주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는가 보다 싶다.
영어로 소통하던 교환학생 시절을 제외하고 우리 커플은 근 육 년째 독일어로만 소통하고 있다. 남편과 나는 서로의 부모님들과 소통하기 위해 각각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배우고는 있지만 그 실력은 아직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한 정도이다. 우리는 독일어로 대화를 하고 사랑을 나누고 다투고 그리고 화해를 한다. 아침에는 라디오로 독일 뉴스를 듣고 밤에는 독일어로 영화 또는 유튜브 영상을 보며 잠에 든다. 남편의 친구들과 함께 만날 때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남편과 남편의 친구들은 나의 독일어 성장의 목격자이기도 한데, 내가 독일어로 겨우 자기소개를 할 수 있을 때부터 알게 되어 지금은 함께 정치, 철학, 시사문제까지 논할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독일에서 독일인 남편과 그리고 독일인 친구들을 만나며 지내다 보면, 가끔은 거울을 보며 스스로 놀랄 때도 있다. ‘아니 이 동양인은 누구야?’ 서구적인 외모를 갖은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하다 거울 속 비친 나의 동양적인 모습을 보며 홀로 새삼 놀라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독일과 독일에서의 생활에 스며들고 있다.
#2
코로나로 인해 한국에 못 간지도 벌써 2년이 다 되어간다. 그 전엔 일 년에 한두 번씩은 꼭 한국에 다녀오곤 했는데 시국이 참 야속할 뿐이다. 매번 한국을 방문할 때면 나는 그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들과의 약속을 잡느라 캘린더를 빼곡히 채우곤 했다. 긴 연애를 하다 보니, 한국에 있는 친구들도 내 남편이(당시엔 아직 남자 친구였지만) 외국인이라는 것에 차츰 익숙해져 갔다. 하지만 연애 초반에 친구들은(또는 지인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곤 했다. “외국 남자랑 연애하니 어때?”, “외국 남자는 로맨틱 해?” 혹은 “외국 남자는 요리도 잘하고 가정적이라던데 네 남자 친구는 어때?” 시간이 지나고 주변에도 결혼한 친구들이 늘어나면서 질문은 추가가 되었다. “외국인이랑 결혼하면 고부갈등은 없어서 좋겠다.”
하지만, 실제 해외생활을 해보고 ‘외국인’과 연애를 해보니 답을 하기가 더 어려웠다. ‘외국인’이라면 한국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한국인을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듯 그 수가 훨씬 많은 외국인을 한 마디로 규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통계를 낼 수 있을 정도로 ‘외국 남자’를 아주 많이 만나본 것도 아니고, 독일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남자는 나의 남편 단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외국인도 다 천차만별이지, 사람마다 다 달라.”라는 대답밖에는 할 수 없었고, 뭔가 분명하고 자극적인 대답을 기다린 친구들은 그새 흥미를 잃고 다른 주제로 관심을 돌리기 일수였다.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케이스인 남편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그는 기념일에 풍선과 촛불로 몰래 서프라이즈를 기획할 만큼 로맨틱하지도, 매일 다른 요리로 나를 감동시킬 만큼 가정적이지도 또는 본인 부모님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나만 알만큼 고부갈등의 씨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그는 단지 그가 할 수 있는 한에서 나를 온전히 사랑해주고, 나를 행복하게 해 주려고 노력할 뿐이다. 로맨틱하면서도 가정적이고, 가정적이면서도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부모님과 사이가 좋으면서도 고부갈등이 생기지 않을 만큼 해주는 남자는 ‘환상’에만 존재한다.
그의 사랑법은 단순하다. 남편은 하루에 정해진 8시간을 꼭 채워 일하지만 나는 프리랜서 겸 주부로 시간을 보내고 있기에 집안일은 대부분 나의 몫이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아침을 차려주지 않아서, 저녁 식사가 제때 준비되지 않아서 혹은 집안이 정돈되어있지 않아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는 법이 없다. 그는 항상 본인이 일하는 것도 ‘우리’를 위해 하는 것인 만큼, 내가 집안일을 하는 것도 ‘우리’를 위해서 임을 안다. 그리고 그는 지치지 않고 매번 나의 ‘tun(함, 행동)’에 감사를 표한다. SNS에 올릴 만큼 삐까뻔적한 감동 이벤트를 할 줄은 모르지만, 기념일이 아니어도 내가 생각날 때마다 꽃을 사 오고 숨 쉬듯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 함께한 지 9년이 다돼가는 지금도 내가 아침에 머리를 산발을 하고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있어도 예쁘다는 말은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하는 그이다.
그러나 좋은 점만을 말해 오히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환상에 불을 붙이지는 말아야겠다. 우리도 다툰다. 독일어가 매우 서툴던 초반에는 나는 독일어를 못하는 스스로를 원망하며 ‘넌 내가 한국말로 싸울 수 있었으면 이미 끝장을 냈어’라는 생각을하며 이를 갈았다. 사실 내가 한국어로는 또 한 말발 하기에 독일어로 밖에 다툴수 없는 전투상황이 유난히 야속하기도 했다. 남편은 원래 화가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한번 화가 나면 큰소리를 낼 때도 있었다. 우리는 열렬히 사랑한 만큼 싸우는데도 진심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지내온 시간만큼 함께 성숙해졌다. 지금의 우리는 다툼의 목적은 서로의 실수를 깨닫고 관계를 더 좋은 방향으로 만들어 나가는 데 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노력한다. 서로 기분이 상해 미움의 말들이 혀끝에 맴돌 때도,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사랑하는 사람임을 잊지 않는다. 내가 그에게, 또는 그가 나에게 중요한 사람인만큼 서로의 성난 말들은 다른 누구보다 서로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음을 늘 상기시킨다. 그러자 다툼의 수는 현저히 줄었고, 그만큼 사랑만 할 수 있는 날들이 늘어갔다. 이는 그가 외국인이어서, 내가 그에게 외국인이어서 가능했던 일이 아니다.
교환학생 후 근 이 년간의 휴학 마치고 오랜만에 한국의 대학교에 복학한 날 아주 오래전 신입생 시절 보았던 남자 선배들이 말을 걸었다. 독일에서 돌아올 무렵 나는 나의 프로필 사진을 남자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으로 바꾸었고 이는 페이스북이 활발히 사용되던 때라 머지않아 대학교의 친구들이 모두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교수의 크리틱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 남자 선배 둘이 슬며시 다가와 이렇게 물었다. “외국 남자랑 사귀니까 좋지?” 그리고는 이어지는 기분 나쁜 웃음. 당시에는 그저 메마른 웃음으로 때우고는 자리를 벗어났지만, 이제는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가 외국인이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고 보니 그가 외국인이었음’을. 아! 그리고 본인들의 행동은 참으로 예의가 없다는 것을.
#3
남편은 며칠 전 친구 둘과 함께 자전거 여행을 다녀왔다. 그는 요즘 우울에 빠진 한 친구를 밖으로 끄집어내기 위함이라 이야기했지만, 이젠 눈빛만 봐도 그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는 나는 남편도 친구들과의 여행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별말하지 않고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을 준비하는 며칠간 남편은 꽤나 신이 난 듯 보였다. 텐트와 침낭 그리고 캠핑용품을 담을 가방을 주문하고, 비상식량과 랜턴 등을 챙기는 그의 뒷모습에선 슬쩍슬쩍 환영처럼 소년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독일로 이주해 정착하는 동안 나는 한동안 ‘남편 분리불안’ 증세를 보였다.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하다는 것이 큰 이유이긴 했지만 어쩌면 낯선 독일 생활에서 남편의 곁은 더욱더 따듯하고 안락하게 느껴졌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남편 없이 나 홀로 빈집을 지키는 날엔 그가 떠난 자리의 서늘한 냉기가 위협적으로까지 느껴졌다.
그러나 나무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나무와 나무 사이에 적절한 공간이 필요하다. 그 사이로 바람이 불고 햇살이 내리쬐어야만 나무는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랄 수 있는 것이다. ‘수관 기피’라고도 불리는 이 현상은 나무의 잎이 서로 겹치지 않게끔 일정 거리를 두고 자람으로써 영양분과 수분을 적절히 공급받기 위함이라고 한다. 만약 나무가 서로를 감싸고 엉겨 붙게 된다면 두 나무는 얼마 가지 않아 성장을 멈추게 될 것이다. 남편과 나는 각각 하나의 나무라고 생각한다. 싹을 틔운 지 삼십 년이 다되었지만 우리는 아직 고목이라 불릴 정도로 크게 자란 나무는 아니다. 우리가 서로의 곁을 지키면서도 따사로운 햇빛을 향해 무럭무럭 자라기 위해서 우리는 적절한 공간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 사이에 새와 나비가 날아오고 그 발 언저리에는 조그만 꽃들도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 남편 없이 다섯 밤을 지내고 나니 남편이 돌아왔다. 자정이 다돼서야 돌아온 남편의 행색은 부랑자와 다름이 없었다. 꼬질꼬질한 옷차림, 덥수룩 자라난 수염 그리고 팔다리를 물고 간 모기들의 흔적을 보니 남편의 지난 시간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날에만 오십 킬로미터를 자전거를 타고 달려온 남편이었지만 우리의 밤은 쉬이 저물지 않았다. 비가 많이 와서 물에 잠긴 길을 달려야 했던 이야기, 텐트칠 곳을 찾지 못해 숲 속의 정자 밑에서 밤을 보냈던 이야기 그리고 그다음 날 맑게 걷힌 하늘을 보고 숨통이 틔였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별들이 모두 잠든 시간까지 잠에 들 수 없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껌뻑이면서도 아이같이 재잘거리는 남편을 보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그날 밤 서로를 꼭 껴안고 잠에 들었다. 서로를 부둥켜안았음에도 우리 사이에는 작은 산들바람이 슬며시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남편은 나에게 선물 같은 사람이다. 늘 나를 웃게 해 줄 만큼 밝으면서도 끈기 있게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만큼 깊고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다. 매일매일이 비슷한 일상 속에서도 남편이 있어 나의 삶은 충만해진다. 벅차오르는 나의 마음을 서툰 언어로 표현하면 그는 나에게 처음과 같은 환한 미소로 대답한다. 네가 있어서 내가 나다울 수 있어. 너는 나를 늘 좋은 쪽으로 이끌어줘. 그러면 우리는 서로의 존재에, 그 감사함에 경탄한다. 사람이란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가! 그리고 한 사람이 나의 세상에 머문다는 것은 또 어떤가. 이 선물 같은 사람을 지구 반대편에서 찾을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놀라움이고 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