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호프집 한가운데 서 있었다.
사람들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 양반이 지금 뭐 하는 거야?"
"미쳤나?"
빨간 티셔츠 입은 아저씨가 말했다.
"아저씨, 좋은 말로 할 때 계산해."
"저 진짜 돈이 없어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아니 진짜로 한 푼도..."
콰직-!
누군가 내 멱살을 움켜잡았다.
"장난하냐 지금?!"
"놔, 놔요!"
"사장님! 경찰 부르세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누군가 내 팔을 붙잡고, 누군가는 어깨를 눌렀다.
'아 씨,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발버둥치며 주머니 속 장치를 또 눌렀다. 연타했다. 미친 듯이 눌렀다.
그때였다.
번쩍-!
눈을 떴을 때, 나는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누워 있었다.
"으으..."
머리가 지끈거렸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익숙한 골목.
내가 기억하는 2026년의 마지막 장소였다.
"고생했다, 관희야."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내 앞에 한 노인이 서 있었다.
하얀 머리, 주름진 얼굴, 이상한 옷, 하지만 묘하게 친근감이 있는 얼굴이었다.
"누, 누구세요?"
노인이 피식 웃었다.
"너야. 80살 먹은."
"...예?"
"2066년에서 왔어. 나도 김관희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40살 나, 20살 나, 그리고 이제 80살 나까지.
"구해왔냐?"
노인이 물었다.
"...뭘 구해와요?"
"정자."
"아, 그게..."
나는 멍하니 주머니를 뒤적였다. 당연히 아무것도 없었다.
노인이 한숨을 쉬었다.
"그럴 줄 알았어."
"미안합니다..."
"미안할 것 없어. 과거를 바꾸는게 그렇게 쉬운일은 아니지."
노인이 벽에 기대 앉으며 말했다.
"앉아봐. 이야기 좀 하자."
나는 조심스럽게 그 옆에 앉았다.
"일단... 제대로 설명 좀 해주세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노인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2066년. 나는 K타임 연구소에서 시간 여행 베타테스터야."
"시간 여행이 정말 가능한 거예요?"
"가능하지. 네가 지금 겪고 있잖아."
"근데 이렇게 늙은 사람을 베타테스터로 쓰나요?"
"2066년에는 80도 청춘이다, 임마."
'이런 쓰벌, 80까지 일해야 하는 미래가 펼쳐지겠구나.'
"2026년으로 테스트차 왔다가, 우연히 40살의 나를 봤어.
골목에서 혼자 외계어 같은 욕을 해대고 있더라고."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때 생각했어. 저놈을 과거로 보내서 젊은 날의 정자를 구해오게 하면 어떨까.
주희가 그렇게 아이를 원했는데..."
노인의 목소리가 잠시 떨렸다.
"아이를 원했다고요? 그럼 저는 결국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건가요?"
"아이는 결국 못 가졌지. 나 때문에..."
"... 주희는... 아니 주희 할머니?라고 해야 하나? 어떻게 됐어요?"
"살아있어."
"아니 살아있는 건 당연하고요, 잘 지내냐고요. 미래에도."
"잘 지냈지. 주희는 괜찮다고 했어. 둘이서도 행복하다고.
근데 난 알아. 평생 마음 한구석이 비어있었다는 거."
"..."
"친구들이 손주 자랑할 때마다, 주희 눈빛이 달라지더라고. 애써 웃으면서도 손은 떨리고.
그럴 때마다 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
노인이 주머니에서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하얀 머리의 할머니가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이게 지금 주희야. 나이가 좀 들었어도 여전히 예쁘지?"
나는 사진 속 주희를 바라보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래서... 나를 2006년으로 보낸 거예요?"
"그래."
"그런 일이 가능한 거예요?"
"타임머신이야 가지고 있으면 누구나 여행이 가능하거든."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다시 갈 수 없나요?"
"응?"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구해올게요.
사실 얼떨떨하기도 하고 꿈 같아서 목표 의식이 없었단 말이에요. 다시 보내주세요."
노인이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다시 보내줄 수는 있어."
"정말요?!"
"근데 아마 한 번 더 가면 연구소에서도 분명히 알아챌 거야. 동일 시간으로 두번이나 기록이 남으니..."
노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마 연구팀이 따라붙을 수도 있어. 절대 잡히면 안 되고, 꼭 다시 스스로 돌아와야 한다."
"알겠습니다."
"아마 지금 배터리가 많지는 않아서 딱 왔다 갔다 하면 끝날 것 같아. 그래도 가능하겠어?"
나는 주머니 속 장치를 꽉 쥐었다.
"할 수 있습니다."
노인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관희야."
"네."
"이번엔 진짜야. 20살 너에게 꼭 건강한 샘플들을 가져와야해.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장치를 잃어버리면 안 돼.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장치 한번 줘볼래?"
나는 주머니에서 장치를 꺼내 건넸다.
노인이 장치를 이리저리 만지며 뭔가를 조작했다. 잘은 모르지만 뭔가 설정을 바꾸는 것 같았다.
"자, 이제 됐어."
노인이 장치를 건네며 미소지었다.
나도 화답하는 미소를 씨익 짓고
주머니 속 장치의 버튼을 눌렀다.
번쩍-!
나는 다시 2006년의 어느 골목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