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머리 외국인

by 호운

도서관 데스크에 앉아 있으면

명탐정이 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책을 누가 훼손했을까?

분명 반납 안 하셨는데 왜 하셨다고 하는 걸까?


딱히 대단한 수사 본능 있는 건 아니지만,

매일 같은 자리에 오래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면 미세한 위화감을

감지하는 일종의 '촉'이 생긴다.


​그날도 평화로운 오후였다.

한 여성분이 키오스크에서 책을 빌리시고는

데스크로 오셨다.

무인 기기로는 처리되지 않는 작업이 있어

도와드리려는데, 나의 촉이 켜졌다.

분명 방금 기계에서 대출하시는 걸 내 눈으로

봤는데, 시스템상 대출 내역은 텅 비어 있는 게

아닌가.


기계 고장인가 싶어 '탐정 모드'를 발동해 들고 계신 책을 조회해 봤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책은 이미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대출 중이었고,

그 이름은 생소한 외국인이었다.

'이분 한국 분이었는데?'

의구심을 품고 당시 회원정보에 등록된 사진을

열람했다.

화면 속 얼굴은 방금 내 앞에 서 있던 그분이

확실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국적은 다른데 얼굴은 같은 사람.

도플갱어인가?

결국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본 끝에

결론에 도달했다.


이분은 이중국적자였고, 각각의 신분으로 카드를

두 장 만들어 도서관 내에서 '셀프 인격 분리'를

하며 이용 중이었던 것이다.


대단할 것 없는 책이라 할지라도,

이런 편법으로 공공재를 독점하는 건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며칠 뒤, 그분이 다시 나타났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가가

주변 이용자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기, 선생님. 카드를 두 장 쓰시던데 규정상 동시

사용은 어렵습니다. 하나는 정리해 드려야 할 것

같은데, 어떤 걸 계속 쓰시겠어요?"

​최대한 예우를 갖춘 배려였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온 건 예기치 못한 샤우팅이었다.


"내가 세금을 얼마나 내는데 이나라는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다고 책도 못 읽게 해!!"

'잘못 걸렸다.'

​갑자기 높아진 언성에 주변의 시선이 꽂히고

나는 순간 명탐정에서 순식간에

슈퍼 을로 전락하고 말았다.

여기서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순간,

나는 '국민신문고'를 비롯한 온갖 민원창구의

타깃이 될 것이 뻔했다.

내 머리와 입은 따로 움직이기 시했다.

기분 상하게 해 드리려던 게 아니었고 죄송하다고

기계적인 사과를 뱉어냈다.

공공재를 수호하려는 의지는

'세금을 낸다'는 무적의 논리 앞에 한순간에

무너졌다.


규정을 지키는 정직한 이들 사이에서 편법을

권리로 착각하는 이들을 마주할 때마다 깊은

회의감이 밀려온다.


​억울함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씁쓸한 뒷맛을

삼키며 다시 데스크에 앉았다.

언젠가 이 이야기를 글로 써야겠다 다짐하며...


※ 그래도 하나의 카드만 쓰도록 만들 긴 했음 v

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