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사서로 일해요."
돌아오는 반응은 복사 붙여 넣기 한 듯 비슷하다.
"와, 개꿀이겠다."
"부럽네요, 하루 종일 책 보는 거 아녜요?"
처음엔 일일이 교정해주고 싶었다.
"아니요, 생각보다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설명할수록 나만 지쳤다.
상대는 가볍게 던진 농담인데,
나 혼자 정색하며 해명하는 꼴이 우스웠으니까.
이제는 그냥 기계적으로 웃는다.
"네, 좋죠 뭐."
그리곤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로 시선을 돌린다.
솔직히 말하면,
악의 없는 그 말들이 가끔은 폭력처럼 느껴진다.
내가 사회에 슬쩍 무임승차하는 사람처럼
취급받는 기분.
이 세계 안에서 나름의 치열함으로 버티고 있는데, 그 노력이 투명 인간 취급받는 기분.
증명할 길도, 억울해할 명분도 없어서
그냥 허허 웃고 마는 그런 기분 말이다.
뭐,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좋은 직업인 것도 맞다.
다만 그 '좋음'의 결이
그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꽤 많이 다를 뿐이다.
미디어가 만든 사서의 환상은 대략 이렇다.
햇살 비치는 창가에 앉아 차 한 잔 홀짝이며
책장을 넘기는 모습.
가끔 찾아오는 우아한 이용자에게
미소로 응대하고,
퇴근길엔 마음에 드는 신간을 품에 안고 나서는
영화 속 한 장면.
언제나 그렇듯 미디어가 문제다.
실제 사서의 하루는
'작은 세계' 하나를 운영하는 것에 가깝다.
수만 권의 책이 제자리를 지키게 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조율하며,
도서관이라는 세상을 지켜내는 일.
어찌 차나 마시며 유유자적할 수 있을까.
진짜 문제는 이 인식이 지인들의 농담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개꿀"이라는 농담은 곧 사회적 시선이다.
그리고 그 시선은 도서관을 운영하는 조직 내부의 시선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편한 곳', '없어도 티 안 나는 곳'이라
여겨지는 분야는 언제나 후순위로 밀린다.
예산이 깎이고, 인력이 줄어든다.
인력과 예산이 마르면
도서관은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이용자가 원하는 신간을 제때 들일 수 없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기획할 동력도 사라진다.
결국 콘텐츠는 매년 복사한 듯 비슷해지거나,
여력이 없어 운영을 하지 않기도 한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이용자에게 돌아간다.
"개꿀"이라는 가벼운 말 한마디가
정책의 결핍까지 닿는다고 하면 너무 거창할까?
하지만 인식이 문화를 만들고,
문화가 정책을 만들며, 정책이 현장을 만든다.
가볍게 던진 말들이 쌓여
결코 가볍지 않은 현실이 된다.
오늘도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엄청 편하시겠어요~"
"네, 좋죠 뭐."
"도서관에 드는 비용이 얼마든, 무지한 국가를 만드는 비용보다는 싸다." — 월터 크롱카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