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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 Nov 29. 2024

비난에 담긴 진심을 읽어주기

Part 1. 상처가 비난이 되는 과정 - 비난의 해석

비난의 전염성


이 브런치북을 준비하며 처음 지었던 제목은, '비난에 상처받지 않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내가 하려는 말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살다 보면 종종 수단에 집중하느라 목적을 잊어버리는 순간이 있다. 비난은 목적을 가린 수단이었다. 진짜 목적은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고, 서로를 이해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비난이 오가는 장면은 흔하게 마주치지만, 나는 여전히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속으로, '저 사람이 지금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하며 비난의 말을 대신 부드럽게 해석해 주고픈 충동이 든다. 둘 다 사실은 서로를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을 뿐인데, 방어적인 말들이 오고 가며 커지는 오해와 깊어지는 감정의 골. 그 과정 하나하나 너무 마음이 아파서 글이라도 쓰게 되는 것이다.


비난의 말은 참 전염성이 강하다. 아주 은근하게 비난의 기운이 섞인 말로 시작된다. "설거지 언제 할 거야?"처럼. 사실은 당장 했으면 싶은 불만스러움을 최대한 참고 억눌러서 좋게 말을 한 거다. 어쩌면 설거지를 하지 않고 있는 상태 그 자체로 약속이 깨어진 느낌, 이미 뭔가 마음에 공격을 받는 듯한 불쾌감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런 대화가 자주 반복되어 온 사이라면 상대방도 진도를 앞질러가 대답한다. "또 시작이다. 내가 한다고 했잖아." 그다음 대사는 아마 누구나 드라마 작가처럼 현란하게 써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소한 다툼이 깊어지는 과정을 돌이켜보면, 별 거 아닌 일로 왜 그렇게까지 화를 냈을까? 하는 후회도 들기 마련이다. 언뜻 사소해 보이지만 아마 내면엔 중요한 것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신뢰감, 배려, 존중 같은 것들. 사소한 약속이라도 잘 지켜주는 행동을 통해 상대방이 나를 얼마나 존중하는지 느낄 수 있다. 다른 일을 함께할 때도 믿을 수 있고, 그런 사람과 삶을 꾸려간다면 참 든든하지 않을까? 하지만 사람은 신이 아니라서 지치고, 피곤하고, 하기 싫은 일을 미루기도 하고, 까먹고 넘어가기도 한다. 그런 한계점까지 수용하고 사랑하기엔 상대방 역시 사람이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있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사람을 다시 믿어보려는 마음에도 한계가 찾아온다. 비난의 말속에 지키고 있는 것들을 해석해 보자면 이렇다.


'설거지할 거지? 제발 설거지를 해서, 혹은 지금 설거지를 할 수 없는 이유라도 좀 알려줘서, 내 불안을 달래줘. 당신이 나와의 약속을 존중하지 않아서 지금 누워있는 게 아니라고 말해줘. 내가 당신을 믿고 앞으로도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내가 사실은 너무 귀찮고 힘든데, 그래도 내 말을 믿어줄 수 없을까? 내가 한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은 나도 나 자신을 믿기 어렵기도 해. 사소해 보이는데 실천하기까지 참 왜 그렇게 어려운 일들이 많은지. 당신이 나를 믿고 기다려준다면, 이런 나도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오늘도 나를 믿지 않고 의심하는 말을 해서 마음이 더 무너지는 것 같아.'




비난을 해석하기


어쩌면 나도 병적으로 비난의 말들을 이해하려 애쓰는지도 모르겠다. 비난으로 상처 입은 마음을 호기심과 탐구력으로 승화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 뾰족한 말들을 깊이 헤아릴수록 그 안에 담긴 마음이 전해지지 못하고 메아리치듯 스스로에게 갇혀 있음이 내게는 꼭 풀어야 할 삶의 숙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퉁명스러움으로 가린 따뜻한 마음, 무표정으로 감춘 사랑받고 싶은 눈빛, 불같이 화내는 그 속에 전하고 싶은 진실. 곡해되고, 오해받으며, 전해지지 않는 마음들은 언제나 내 눈물버튼이다.


그래서 비난의 말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 속에 담긴 사랑과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눈을 모든 이에게 장착할 수 있을까, 그런 것들을 고민하는 게 나의 일상이다. 이게 나의 직업이 아니었더라면 그냥 생각 많고 피곤한 잔소리꾼으로 살아갈 뻔했다. 심리상담사라는 직업이 존재해서 어찌나 다행인지 모른다.


앞선 글에서 비난은 혼잣말이고, 그 사람의 생존법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했다. 거기에서 좀 더 나아가서 오늘은 '연결'과 '분리'라는 키워드로 비난을 이해해보려 한다.


우리는 좋아하고 이상적으로 여기는 것들에 연결되고 싶어 한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 따라 하고 싶은 라이프스타일, 나의 정체성과 연결 짓고 싶은 브랜드의 물건들을 구매해서 '연결'된다. 그리고 반대로 내 삶에서 '절대 그런 일은 없었으면' 하는 것들과 '분리'되고 싶어 한다. 정의롭지 않은 것, 악하고 잔인한 것, 나약하고 쓸모없는 것들을 멀리하려고 하고, 그런 사람이 다가오면 분노와 혐오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때 분리되고자 할 때 쓸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비난'이다. 만약에 "게으른 사람은 굶어야지. 자격이 없어."라고 비난한다면 어떨까? 그 말을 함으로써 자신은 게으름을 절대 옹호하지 않는, 게으름과 정반대 영역에 선 사람이 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게으름과 멀어지는 느낌, 그리고 사람들에게 난 게으름과 먼 사람임을 공표하는 것. 비난으로 내 정체성에서 분리하고 싶은 것을 떼어낸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누군가 하는 말속에서 무엇을 좋다고 판단하고, 나쁘다고 판단하는지를 잘 살펴보면 그 사람의 내면세계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타인에 앞서 우선은 나의 내면세계를 먼저 이해해 보자. 타인의 내면세계는 들어가 볼 수 없어서 오직 상상으로 그칠 뿐이니까. 좋고 나쁨의 판단은 너무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라서 사실 스스로 알아차리기가 어려울 수 있다. '이건 내가 좋다고 판단하는 걸까 혹은 진짜로 좋은 걸까?'라는 물음도 떠오를 것이다. 한 가지 팁이 있다면, 이 세상에 진짜로 좋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같은 한국사회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함께 좋다고 말하는 것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로 좋은 것이란 법은 없다. 좋음이란 건, 언제나 주관적 해석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좋다고 해석하는 것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당신이 좋다고 느끼는 건 모두 당신의 주관적 해석의 영역으로 넣어도 된다.


 비난을 깊이 해석해 보면, 한 사람의 사고체계와 살며 겪어온 경험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비난을 통해서 우린 무언가를 보호하려고 한다. 연결되고 싶은 그 무엇과 가까운 거리를 지키려고 한다. 그리고 멀어지고 싶은 것을 내 삶에서 분리해 내려 애쓴다. 그래서 비난에는 해석이 필요하다. <사실은 지금 내가 무언가 좋은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서 슬퍼. 멀어지고 싶은 것이 다가오는 것 같아 두려워.>라고. 당신이 먼저 비난에 담긴 진심을 용기 내어 말할 수 있다면, 비난은 전염력을 잃어버리고 그 자리에 사랑이 채워질 것이다. 소중한 모든 관계 사이에 사랑이 스며들 수 있기를, 나는 오늘도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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