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3. 스스로 주고받는 상처
자기 비난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거쳐야 하는 가장 속상하고 괴로운 관문이다. 타인으로부터 들은 말, 판단, 비난, 눈빛 그런 것들이 내 마음에서 무언가를 좌절시켰을 때 상처가 완성된다. 완성된 상처는 더 이상 타인의 입술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서 반복 재생되는 메시지가 된다. 반복될수록 출처는 흐려지고 이것이 타인이 던진 말인지,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누군가로부터 상처되는 말을 듣고 난 이후에 시간이 흐르다 보면 더 이상 그 사람은 곁에 없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남긴 것이 내면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상처가 온전히 내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자기 비난은 참 속상하고 억울한 관문이다. 이 상처가 왜 내 것이어야 하냐고 반박하고 싶다. 왜 내가 상담을 받고, 불면증을 겪고, 사회생활을 그만두어야 하냐고 묻고 따지고 싶다. 속상하지만 상처에 책임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 삶에 책임자는 오직 나뿐이라는 것을 수용하기까지의 여정 또한 내가 걸어간다. 속상하고, 억울하고, 세상에 분개하는 그 감정들이 모두 자기 비난이라는 관문을 넘기 위해 내 가슴으로 토해낼 것들이다.
모든 분노를 토해내기까지 이 말은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내 삶의 모든 것이 내 책임이라는 건 불행이 아니라 다행이다." 우리는 부정적 감정을 건너뛰고 희망으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희망을 갖자고 상처를 붙잡고 이야기해 보자면, 내 삶을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이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 일인지 모른다. 타인이 그만큼 인격적으로 성장하기까지 하염없이 무력한 기다림을 반복하지 않아도 되며, 앞으로 또다시 타인에게 휘둘릴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아도 된다. 내가 책임지고 일어서는 것을 경험하고 나면 다음에 찾아올 상처도 같은 방법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효능감 같은 게 자라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엔 자기 비난이라는 힘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참 많다. 나 스스로를 비난한다는 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너무 커서 생기는 일이니까. 동시에 지금 이 모습 그대로는 도저히 사랑해 줄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과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렇게 상충한다.
심리상담을 진행하면서 자기 비난의 힘이 약해지면, 실제로 뭔가를 노력하게끔 만들던 불안이 낮아져서 마음은 편안해지지만 이전처럼 치열하게 노력하기가 잘 안 되기도 한다. 특히 이러한 힘이 중요한 20대의 시기에는 그래서 더더욱 자기 비난을 잘 내려놓지 못한다.
스스로에게 해로운 듯이 보이는 행동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얻어지는 이득이 있다. 그 이득이 참 중요하기에 해로움을 감수하는 것이다. 물론 무의식 중에 벌어지는 일이기에 의식적으로는 이 행동을 멈추고 싶지만 쉽게 멈춰지지 않는다. 머리와 행동 사이 괴로운 갈등이 벌어진다. 자기 비난은 계속 나를 고치고 수정해서 더욱 완벽해지고 좋은 사람이 되어가고자 하는 노력이다. 여기서 '완벽하고 좋은'에 들어가는 내용은 사람마다 다르다. 더 착하고 무해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모든 타인의 불쾌감을 내 탓으로 돌리는 자기 비난을 한다. 더욱 무결점의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누군가 '이런 게 문제야'하는 말을 잘 흡수한다. 뭐든지 문제라고 하는 것들은 완벽하지 않을지도 모를 두려움을 유발하는 동시에 더 완벽해질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비난으로 세월을 버텨온 분들은 그 삶을 회고하며 스스로를 토닥이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 생존하려고 그토록 열심히 발버둥을 쳐왔구나. 그래서 또 얻어진 것도 있고, 알게 모르게 이뤄낸 것들도 있었구나 하며. 물론 자기 비난이 언제나 생산적이지는 않다. 어떤 자기 비난은 옴짝달싹 못하고 방에 갇혀있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방에서 버텨내는 시간에서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어떤 에너지를 응축시킨다.
앞서 내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곧 지금의 내 모습을 도저히 사랑해 줄 수 없다는 의미라고 했다. 그래서 자기 비난이 시작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는 도저히 머무를 수 없다는 불안이 피어난다.
특히 공부를 잘하는 상위권 학생들이 자기 비난을 가진 케이스가 참 많다. 우리나라에서 공부를 하고 높은 성적을 내는 건, 학구적 호기심만으로 이뤄내기 어려운 일이다. 수많은 청소년기의 욕구들을 억눌러가며 매 순간 스스로를 내몰듯이 살아야만 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공부를 잘한다는 건, 그만큼 공부에 대해 '괴로움을 견뎌서라도 해내야만 한다'라는 신념이 있다는 뜻이다. 그 말인즉슨, 성적이 낮은 나 자신을 절대로 수용할 수 없고, 그 모습으로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으며, 타인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강렬한 두려움을 수반한다는 의미다.
그러다 보니 대학생이 되어 번아웃이 온다. 스스로를 내몰아서 견뎌왔는데 그 끝에 보상은 너무도 짧다. 대신 계속해서 내몰아치는 삶이 이어진다.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취업준비를 하거나 고시준비를 하고, 취업을 하고 나서도 더 나은 배우자감이 된다거나, 더 나은 부모가 되기 위한 채찍질이 멈추지를 않는다. 요즘은 모두가 팔방형 인재가 아니면 흠을 잡기 바쁘다. 다 준비해도 빠진 것을 기필코 찾아낸다. 어디에서 멈춰야 할지, 멈춰도 괜찮을지, 불안한 마음에 공부도, 돈도, 취미도, 외모도, 뭐든 채워 넣어 본다.
자기 비난을 통해 무언가를 계속 성취할 수는 있지만, 내가 원하는 삶을 향해 나아갈 수는 없다. 마음이 편안해지거나 스스로를 사랑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는 없다. 자기 비난과 자기 사랑은 서로 상충하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를 사랑하려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보고, 성장 대신 깊은 이해의 시선이 필요하다.
자기 비난을 멈춘다면, 성장도 멈추는 것일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수용하고 나면 앞으로 쭉 이 상태로 살겠다는 뜻 아닐까?
이런 질문들로 인해 사람들은 자기 비난을 멈추는 것을 걱정한다. 멈춰선 안된다고, 도태될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기 비난으로 성취하는 것들이 있다면, 자기 사랑으로만 성장할 수 있는 영역도 있다. 자기 비난이 비교적 사회적 기준을 채우는 데 유용하다면, 자기 사랑은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을 찾는데 유용하다. 불안으로 스스로에게 위기감을 주며 달려가는 대신,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나아가고 싶은 열망을 찾아 성장하는 원동력이 있다. 그 힘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문제점을 고치는' 대신 '깊이 이해해 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을 해내지 못하는 스스로를 문제라고 여긴다. 과제를 해야 하는데, 회사 일을 해내야 하는데, 해내지 못하고, 미루고, 하기 싫고, 의욕이 생기지 않는 마음을 탓한다. 이럴 때 육아 지침은 어른들의 마음을 해석하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어린아이가 무언가를 하기 싫다고 말할 때는, 그것을 잘하지 못해서 속상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내가 무언가를 하고 싶지 않고, 의욕이 생기지 않을 때는 그 마음을 고치는 게 아니라 깊은 속뜻을 이해하려고 귀 기울여 보자. 나에게 너무 어울리지 않는 일을 택한 건 아닌지, 애초에 내 마음이 어디를 향하는지 너무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닌지. 무작정 새로운 길을 택하라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있는 자리에서 얼마든지 그 일과 나의 기질적 장점을 연결 지을 수 있다. 그런 연결을 통해 나만의 직업적 정체성이 생기는 것이다.
자기 비난은 결국 어느 시점에서 내려놓아야만 하는 때가 찾아온다. 연애나 결혼을 하거나, 부모님과 가까이 지내려 할 때마다 자기 비난이 그 관계를 괴롭히게 된다. 우리는 가족을 나의 정체성과 연결 지어 바라보기 때문에 가족이나 연인은 내 정체성의 연장선에 놓여있다. 그래서 타인에게 아무리 관대하더라도 스스로에게 비난을 하는 사람은 가까워질수록 비난을 손쉽게 질러버린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비난하는 패턴 속에서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고, 계속 내가 잘 되어야 한다는 목적을 이어갈 뿐이다. 그리고 어느새 그 목적의 수단으로 살아가게 된, 어딘가 주객전도된 느낌이 찾아온다. 내가 나를 위해 사는데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는 순간이. 자기 비난의 장점을 많이 누렸다면 이제는 사랑이라는 단계로 성장할 때이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곁의 소중한 사람도 지킬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