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4. 공감을 선물하기
사실 누구에게도 마냥 쉬운 삶은 없다. 어느 정도의 고민과 혼란, 심리적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간다. 스트레스가 극심하다고 해서 꼭 심리상담소에 오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견딜 수 없는 무엇'을 맞닥뜨렸을 때 비로소 외부의 도움을 구하게 된다.
그래서 처음 내담자를 만나면, 상담소에 오기로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순간이 언제인지를 묻는다.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는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보다 더 중요한 것이 '타인에게 나의 고통이 표출되는 때'라는 걸 발견했다. 내가 안에서 느끼는 고통은 견딜 수 있지만, 이것이 밖으로 새어나갈 때 느끼는 두려움이 더 큰 사람들이다. 왜 그것이 '견딜 수 없는 무엇'이 되었을까?
실제로 어떤 내담자는 첫 상담에서, 지난 수개월간 간헐적으로 스트레스성 하혈을 했다고 한다. 야근이 너무 많고, 집에서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해 스트레스가 표출될 곳이 없었다. 들어보니 수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심리상담소에 올 법한 일은 참 많았다. 야근이 너무 많은데 업무를 거절하지 못했을 때, 처음 하혈이 나타났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다녀와 또 일을 맡았을 때, 집에 와서도 배우자에게서 타박을 듣고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때... 그러나 그분이 상담소에 찾아온 계기는 '내가 사람들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이들뿐만 아니라 누구나 자신만의 두려움이 있다. 다만 두려움의 주제가 다를 뿐이다. 완벽해 보이는 사람은 결함에 대한 두려움이, 강인해 보이는 사람에게는 나약함에 대한 두려움이, 그리고 상냥하고 친절해 보이는 사람들의 깊은 내면엔, 공격성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두려움의 반대편에서 완벽하고, 강인하고, 상냥해 보이는 것을 '추구함'으로써 인간관계에서 안전하게 존재하려고 한다. 결함을 들켜서 창피당하지 않는 완벽함이 주는 안전감, 나약함을 들켜서 무시당하지 않는 강인함이 주는 안전감, 그리고 내면의 공격성을 억압함으로써 갈등과 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는 상냥함이 주는 안전감을 추구한다.
이런 두려움의 회피와 안전감의 추구에 담긴 각각의 주제들은 어떻게 생겨날까? 그건 타고난 기질과 후천적으로 마주하는 환경의 조합이 그만의 '경험'이 되어 '감정'과 '해석'을 낳는다. 만약 두려움에 대해 이해하고 싶다면 자신이 타고난 기질적인 면과 그 기질로 인해 환경을 받아들이며 겪은 어려움이 무엇이었을지, 그 어려움의 결과 세상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언제부턴가 '무해한' 것들의 유행과 함께 '폭력'에 대한 광범위한 정의 또한 유행하기 시작했다. 과거에 대항할 수 없이 받아들였던 것에 대해 이제는 '그거 폭력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두의 인권이 존중받는 것은 너무나 환영받을 일이지만, 무엇이든 극단으로 향할 때 부작용이 생기곤 한다.
폭력적인 것들에 대해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폭력적인 것이 세상에서 줄어들었으면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상처 입은 마음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폭력적인 것을 무조건 '아주 나쁘고 해로운 것'이라고 정의 내리며,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한다면 결국엔 우리도 역시 폭력으로 대항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래서 이런 대응은 또 다른 폭력을 생성하는 게 아닌지, 폭력이 사라지는데 도움이 되는지는 의문이 든다. 폭력적인 것들이 정말로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바란다면 그보다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한 것 같다.
공격적인 것들이란 느낌은 사실 타자의 입장에서 해석된 것이다. 공격성을 발휘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욕구의 표현, 혹은 자기 보호라고 해석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가해'일지라도 적어도 공격하는 자의 주관적 입장에서 해석해 보자면 말이다.
"폭력은 충족되지 않은 욕구의 비극적 표현이다"
비폭력대화 치유법으로 유명한 로젠버그의 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때, 화가 느껴지는 것은 누구나 그러하다. 하지만 이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무작정 억압하다가 어느 날 분노로 터지거나, 힘의 논리로 얻어내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타인의 입장에서 보면 '가해' '공격' '나쁜 사람'이라고 해석되며,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함' '분통 터짐' '제발 누군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될 수 있다.
계속해서 공격성을 당사자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이유는, 공격성을 '나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사람이 타고난 본능적인 부분임을 말하고 싶어서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 말처럼, 우리는 누구나 소중한 것을 침해당하면 분노를 통해 지키려고 한다. 부모님 욕을 하면 화를 내고, 내 자존심이 밟히면 발끈하며, 내가 일한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면 공격적 대응을 취해 받아내고자 한다.
그런데 공격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를 억압하는 사람은 어떨까? 분노는 결국 '보호'의 기능을 하는데 나 자신을 보호하는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갈등하고 싸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나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지를 넘어선다. 그래서 처음에 언급한 사례처럼 내 몸이 아무리 상해도 보호할 생각을 못한다. 그런 이들이 상담을 통해 변화의 의지를 갖는 순간은, 내가 짓밟히는 때가 아니라, 내가 꿈틀 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때 가장 피하고 싶던 '갈등 상황'이 현실이 될 것 같은 두려움이 턱 하고 다가오기 때문이다.
나도 무해한 것들을 바라볼 때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몽글몽글해진다. 아기 강아지, 귀여운 캐릭터, 무해한 표정을 가진 어떤 연예인들을 볼 때 드는 안도감이 있다. 하지만 한편에 그로 인해 '공격성'이 '나쁜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리는 극단적인 상황이 우려되기도 한다. 언제나 무해한 사람의 곁에는 착취적인 사람이 궁합이 잘 맞기도 하다. 내가 요구하고 거절하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다 보면, 인간관계에서 나의 욕구와 너의 욕구를 반반씩 균형을 맞추는 일이 어렵다. 나의 욕구는 억압하고 너의 욕구를 들어주는 '무해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반대로 내 뜻대로 상대방을 통제하고픈 사람과 궁합이 참 잘 맞게 된다.
혹시 이 글이 공감된다면, 조금 용기 내어 내 두려움을 마주해 보기를 바란다. 내가 가진 공격성에 대한 두려움을. 거절하는 상황에서 느껴지는 죄책감을. 갈등이나 싸움의 상황을 두려워하게 된 내 마음은 어떤 히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걸까? 나는 왜 스스로를 보호하는 대신 무해함을 인간관계 전략으로 사용하게 되었을까?
이 성격을 180도 바꾼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그런 것을 권장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갈 길은, 대체로 무해한 사람으로 지내지만, 내가 나를 보호하는 순간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대방의 뜻을 주로 따르지만, 내 뜻대로 하는 순간도 한두 번쯤 만들어 보는 것이다. 그것만으로 당신은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되어줄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