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4. 공감으로 단단해지기
그간 소개한 타인의 비난으로부터 내 마음을 지키는 방법을 정리해 보자면 우선은 타인의 영역과 나의 영역을 나누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타인의 비난을 타인의 혼잣말로, 그 말속에는 그 사람의 가치관이나 삶의 태도들이 담겨 있음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의 영역으로 돌아와서 내가 상처 입었거나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나의 기대나 욕구가 좌절되었다는 의미임을, 또 사람마다 각자 상처 입는 고유한 주제들이 있음을 이야기했다.
즉 비난으로 상처 입었을 때, 그 안에는 상처를 준 사람과 받은 사람에 대한 수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상처를 통해서 나 자신과 타인을 더욱 깊이 이해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나 자신을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내 삶의 방향성을 더 근원적으로 만족스럽고 충만하게 설정할 수 있도록 하며, 타인을 깊이 이해하는 것은 자의적인 해석으로 상처 입는 일을 겪지 않도록 해준다. 두 가지 모두 우리 자신의 마음을 단단하게 해 준다.
이제는 실전으로 넘어가 보자. 비난으로부터 내 마음을 지키는데 가장 든든한 보호막은 바로 자기 공감이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자기 비난을 하는 대신에 자기 공감을 하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공감을 많이 하면 마음이 약해질 것이라고 오해한다. 공감은 허락이 아니며, 문제점을 긍정적으로 덮어버리는 회피가 아니다. 오히려 공감은 내 마음의 가장 중요한 진실을 바라보는 힘을 준다. 눈물에 빠져 계속 우는 게 아닌, 눈물을 흘리고 깨끗해진 두 눈동자로 명료하게 나에 대한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다.
공감은 사실 심리상담사에게 '주 무기'라고도 볼 수 있다. 거의 대부분의 일들에 상담사는 공감을 처방한다. 물론 공감의 단계나 방향 설정에서 디테일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상담사가 공감을 처방하는 목적은, 결국 내담자의 자기 공감력을 높이는 데 있다. 스스로에게서 이해하기 어렵고, 고치고 싶은 어떤 문제점은 자기 비난의 대상이 되곤 하는데, 이때 비난 대신 공감적 태도로 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상담이 끝난 이후에도 스스로를 지킬 무기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아서, 마지막 마무리에는 꼭 가장 중요한 공감들을 꺼내어 복습하곤 한다. 이것이 마치 무언가 소중한 것을 주는 것 같아서 나는 '공감을 선물한다.'는 표현을 좋아한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회적 분위기 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에 어려움을 겪는 주제들이 있다. 그중 4가지-우울, 분노, 나약함, 공격성-을 실습 대상 삼아 공감을 해보려 한다. 심리상담은 아주 개인화된 작업이라서 우울도 모두가 같은 우울은 아니겠지만, 이 작업을 참고해서 스스로의 마음 또한 좀 더 세심하게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라본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공감을 선물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그 감정이 더 커져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다. 우울하거나 화가 난 사람에게 공감을 해주면, 그 감정을 허락하는 것 같아서, 그 감정에 '동의'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 감정이 더 확장되는 것을 멈추고 싶은 마음에 막아선다. 그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 상대방을 위로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공감과 반대되는 이런 말들이 나오는 것이다. '그 사람이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렇게까지 슬퍼할 상황은 아니야. 너에겐 희망적인 것들이 여전히 많아.' 등등.
그러나 공감은 허용도 아니고 동의도 아니며 그 감정을 키워내지도 않는다. 우리 인간의 감정은 공감을 받으면 해소된다. 내가 심리상담을 한창 공부하던 대학원생 시절에는 도대체 얼마나 강렬한 고통까지 공감으로 해소될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 답을 찾아 헤맬 때마다 밑바닥에서 고통을 토해내는 사람들이 공감을 얻고 다시 살아가겠다고 눈빛을 되찾고 일어서는 모습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 그리고 무기력한 내 마음이 '살고 싶다'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처럼 진한 공감은 물론 몇몇의 대단한 상담가 선생님들에게서만 목격한 바이지만, 작은 공감들도 제자리에서 매 순간 사람들을 살게 하고 있다.
공감은 감정에게 있는 그대로 바라봄을 허락하는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을 슬퍼하지 않게 위로하려고 애쓴다면, 당신은 이미 공감에 실패했다. 아무리 따뜻하게 대하려 애써보아도 슬픔을 없애야 할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모든 말과 표정이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내 마음 안에서 '슬픔'을 '없애야 할 문제'라고 판단하는 마음으로부터 공감 훈련은 시작된다.
슬픔을 '없애려는 욕구' 없이 슬픔을 바라볼 수 있을까? 그러려면 결국 스스로의 삶 속에서 슬픔에 대해 만들어진 태도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내 삶 속에서 나는 슬픔을 어떻게 배워왔고 경험해 왔을까? 거기에서 부정적인 경험들이 판단들을 만든다. 내가 슬퍼할 때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고 오히려 약점을 잡혔다면, 그만 슬퍼하라고 다그치는 소리를 들었다면, 혹은 내가 슬퍼할 때마다 나 때문에 더 크게 슬퍼하는 부모님의 감정에 더 슬픔이 커졌다면, 당신은 슬픔이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어려울 것이다. 슬픔과 당신의 관계에서의 사슬을 풀어 슬픔도 삶에 존재해도 괜찮다는 허락을 할 수 있을 때, 슬픔에 담긴 다채로움을 있는 그대로 만날 수 있다.
슬픈 사람에게, 혹은 슬픈 내 마음에게 공감하고 싶을 때 그곳엔 대단한 미사여구가 필요치 않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첫 단추이다. 네가 참 슬프구나. 혹은 나 자신의 느낌 그대로. 슬프다. 그렇게 단순한 말만 반복하고 반복해도 그 감정은 자신을 바라봐주는 이가 있음에 반가움과 고마움을 느낀다. 보이지 않게 꾹 눌러 숨어버리고, 술이나 매운 음식으로 모습을 바꾸지도 않고, 내 몸에 병으로 가버리지도 않고 그냥 슬픈 감정으로 흘러나온다. 그렇게 공감은 감정이 내 안에 쌓이지 않고 해소되어 흘러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