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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 Oct 24. 2021

우울코드 2-7-0

새로운 선택에서 만난 것들


 2-7-0 코드가 선명했다. 우울한 내담자들에게서 늘 보던 바로 그 코드다. 바로 내 심리검사 결과지에서 말이다.


 나에게 단기 우울증을 안겨준 뼈아픈 경험이 하나 있으니 그건 바로 상담심리사 자격증 면접에서 떨어진 일이다. ‘불합격’이라는 선명한 글씨를 보고도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살면서 가장 열심히 했던 일이었고, 어려운 필기도 다 통과했고, 면접도 나쁘지 않게 본 것 같았다. 나의 면접관이던 교수님을 그다음 주, 어떤 교육에서 우연히 만났지만, 나를 보며 분명 온화하게 미소 짓고 계셨단 말이다. 내 착각이었을까…


 불합격이 뜬 이후로 나는 글로만 공부했던 우울증을 몸으로 공부했다. 어느 날은 정신 차려보니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걷고 있었고, 사고가 너무 느려서 하루가 짧아졌다는 것도 느꼈다. 눈앞에 물이 있고, 목이 마른데, 주전자가 무거울 것 같다고 생각하며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만성적인 무기력감과는 달리 급성으로 찾아온 우울증은 숨길 수가 없어서 나를 보는 사람들마다 지금도 그때를 얘기하곤 한다. 그때 너무 힘들어 보여서 참 걱정되었었다고.


 얼른 심리상담을 받으러 갔고, 선명한 우울증 코드를 보며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나의 지렁이 같이 기어가던 프로파일이 저렇게 급변할 수도 있구나? 책에서 말하던 게 바로 이런 거구나?





 다행스럽게도 나는 굉장히 긍정 편향적인 사람이라서 우울함 속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 이번 기회에 우울에 파묻혀 보고, 이겨내 보기도 하지 뭐. 심리상담사에게 이렇게 좋은 배움이 또 어딨어?


넘어질 때는 제대로 넘어져야 한다고. 그래야 실패에서 배울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회피하지 않고 넘어져서 밑바닥에 가보기로 했다. 얼른 털고 일어나서 괜찮은 척하지 않기로 했다. ‘괜찮은 척’이 너무 하고 싶었지만, 누가 물어보면 안 괜찮다고 말했다. 눈물을 쏟고 마음이 무너진 채로 다녔다.


 다행히도 나의 주변에는 그런 나를 포용해주고, 토닥거려주고, 괜찮아질 거라고 꼭 안아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심리상담을 받다 보면 인간관계의 양상이 조금 달라지는데, 아무리 친해도 내 편이 아닌 사람과는  서서히 멀어지게 된다. 상담을 통해 공감을 받아본 사람들은, 이제 사랑인 척 비난하는 사람과는 예전처럼 관계를 맺을 수가 없게 된다. 내가 나를 비난하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혹은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변하면, 상대방이 나를 대하는 태도도 역시 달라지기도 한다.






 무너진 마음을 다시 제대로 세우려면 뭘 해야 할까 고민해보았다. 나를 그렇게까지 무너지게 한 핵심적인 불안은, ‘내가 심리상담을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데, 자격증이 없으면 증명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친 듯이 공부를 시작했다. 심리상담 공부를 말이다. 진짜 심리상담을 잘한다는 게 뭐지? 심리상담에서 내가 하는 일이 뭐지? 내담자의 삶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고, 도움을 줄 수 없는 한계점은 뭘까? 단순히 지식을 쌓았다기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파헤치고 들어갔다. 본질로 들어갈수록 나의 우울도, 실패도, 또 내가 하는 일도 명료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단순히 자격증을 따는 게 아니라,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나는 불안을 이겨내는 방법 한 가지를 배웠다. 우선 나는 회사원이 아닌, 프리랜서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실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근본적인 불안을 건드린다. 실력을 추상적으로 생각하거나, 사회적 정의에 따르는 것 역시 불안을 가중시키는 요인이었다. ‘진짜 실력’이 뭘까에 대해 집요하게 고민하고 공부했다. 이 방법으로 본질적 두려움에 접근하고 마주해 보면 용기가 생긴다. 죽음이나 끝없이 가난한 상황, 평생 이름 석 자 어디 남기지 못하고 떠나는 일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게 깊은 본질로 들어갈수록 불안의 정체는 또렷해졌고, 마주해보면 오히려 조금씩 용기가 생겼다.


 이렇게 밑바닥을 기어가는 시기는 나뿐만 아니라 퇴사하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모든 내담자들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온다. 우리는 회사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서 새로운 룰을 배운다. 익숙하지 않은 곳이고, 누가 규칙을 정해 놓은 것도 아니라서, 뭘 배워야 할지 모르겠는 무력감이 가득하다. 그래서 회사 밖을 지옥이라고 부르나 보다. 불안의 지옥이다. 그곳을 구르다 보면 나처럼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순간도 온다.


 퇴사하고 뭔가 보여주고 싶고, 잘 한 선택이라고 인정받고 싶은데, 그렇게 되기까지 수년이 걸린다. 수년 동안에 밑바닥을 구르며 괴롭겠지만, 우리가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않아서 생기는 일은 아니다. 건강하기에 그 모든 불안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아파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것이다. 정답이 없는 세상에서 스스로 규칙을 발견하고 나만의 안정감을 찾아가는 일은 그렇게 고통스럽지만 지나고 보면 참 대견한 일이다.


 누군가 나에게 다시 한번 그런 실패를 맛보게 해 준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그래도 한 3년만 쉬고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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