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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 Oct 24. 2021

사랑을 할 수 있는 심리적 능력

진짜 사랑을 찾아서


 심리상담을 공부하다 보면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들에 대해 현타가 오는 순간이 있다. 인간의 마음을 심리도식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각각의 도식마다 갈구하는 결핍된 욕구가 있고, 이를 은밀하게 충족시켜주는 대상을 만나면 운명적인 느낌을 받는 것이다. 심리상담가가 아닌 이상, 보통 자신의 결핍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에,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고,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끌리는 느낌’을 운명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있다. 바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 대한 오해를 푸는 일이다. 돌이켜보면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라, 자신의 상처를 보호하고 있었던 거다. 혹은 결핍된 것이 더 이상 충족되지 않았거나. 꼭 애인관계의 사랑만이 아니라, 친구나 가족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자녀가 중학생쯤 되면, 부모님에게는 수능이 현실로 다가오고, 아이의 진로가 걱정된다. 주변의 누구는 어디에서 무슨 상을 탔고, 누구는 과고에 붙었고, 반에서 1등을 했고 하는 이야기들이 들려온다. 그러다 보면 부모님은 아이를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능력을 상실한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아서 잔소리하거나, 채찍질하거나, 성적만 가지고 아이를 판단하고, 공부 외의 어떤 주제로도 대화가 안 통하고, 어떤 다양한 주제도 공부로 통하는 마법 같은 대화의 기술들은 그들이 불안해서 생기는 일이다. 결국 그 불안은 아이에게 전염되지 않으면 천만다행이고, 공부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궁극적으로 진로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지만 말이다.


 화를 자주 내는 부모도 그렇다. 평소에 잘 대화하다가도 쉽게 비난 모드로 돌아서고, 무섭게 화를 몰아치는 부모, 혹은 주변인들. 그들은 남을 사랑하기엔, 내면에 지켜야 할 자기 자존심, 혹은 절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약한 모습이 건드려질 때마다 무섭게 화를 낸다. 우리는 공격받는다고 느낄 때 분노한다. 분노는 나를 지키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 이글이글 끓는 분노를 느껴본 적 있는가? 왠지 누구 한 대 칠 수 있을 것 같고, 내가 뭔가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분노는 강해진 느낌을 준다. 화를 낸다는 건, 너를 사랑하지 않거나, 너에게 상처를 주고 싶다는 뜻이 아니다. 나의 약함을 들키고 싶지 않고, 나를 지키고 싶다는 뜻이다.


 감정의 속에 담긴 마음을 공부하고 나니 불안한 엄마와 분노하는 아버지가 보인다. 그들은 나를 충분히 사랑하지만, 가끔은 사랑하는 능력을 잃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모드로 돌아서는 것이다. 우리의 사이를 단절해서라도 지키고 싶은 내면의 무언가를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자기 보호를 위해 자식인 나를 불안하지 않은 영역에 두고 통제하려고 한다거나, 되려 공격하시기도 한다. 예전엔 그런 순간마다 나도 고개를 저으며, ‘역시 가족은 가까이하지 않는 게 최선이야.’라고 생각하며 내 마음도 굳게 닫았다.


 그래도 자녀양육의 부담을 마치시고, 불안도 낮아지고, 보호할 것도 적어진 부모님, 그리고 상담심리를 공부한 나까지. 우리 가족은 이제 예전보다 평화를 되찾았고, 솔직하게 대화를 나눈다. 가끔 부딪히는 일이야 여전히 있지만, 이제는 마음을 닫았다가도 다시 열 수 있다. 부모님도 나도, 잠시 사랑하는 능력을 잃는 순간이 있었을 뿐,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란 걸 이제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병리적 자기애의 가장 큰 비극이란, 남을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가버드라는 심리학자의 이 말을 나는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엔 상담받기 이전의 나를 떠올렸고,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내담자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렸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에게 가장 온전히 사랑하기 어려웠던 존재를. 나에게 왜 그렇게 많은 상처 주는 비난을 하는 걸까, 나는 또 왜 그렇게 모난 말들로 되받아쳤을까. 답이 없어서 고민도 하기 싫었던 문제를 떠올렸다.


 우리는 왜 결혼하지 않을까? 모두는 아니지만, 일부는 사랑하는 능력보다 자기를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비난에 취약할 수밖에 없으며, 취약한 내면을 들키지 않아야 하고, 늘 괜찮은 사람이어야만 한다. 보여지는 타이틀들이 곧 평가의 잣대이다. 사랑이라는 게 서로의 잘난 모습을 자랑하는 일이 아닌데, 경제력이 사랑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자리하면서 결혼은 사랑이 아니라 평가와 판단으로 시작하는 일이 되었다. 소개팅을 나가도 스펙부터 줄줄 읊는 세상에서 누가 사랑을 하고 싶을까? 스펙은 그럴듯 하지만, 사실 내면이 빈 껍데기같이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그냥 들키지 않고 아무와도 엮이지 않는 것이 나를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니. 멋있는 모습으로 연애만 하다가 결혼 전에 도망가면 늘 언제나 ‘멋진 사람’으로 남을 수 있겠다.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다. 수많은 심리학자들 덕분에 그것이 사랑이 없어서가 아닌, 사랑의 능력이 부족해서였음을 알게 되어서. 그리고 나는 제대로 사랑을 주고받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어서.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내가 온전히 사랑해줄 수 있어서. 상처를 받아도 마음의 문을 다시 열어 놓을 수 있어서. 우리 부모님 세대에게는 그런 교육이 없었다. 오은영 박사님도 없었고, 심리상담소도 없었다. 비록 우리는 부모님에게서 사랑하는 능력을 배우지 못했을 수 있지만, 다음 세대에게는 알려줄 수 있다. 우선 우리 세대부터 배워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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