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없는 사람과 내가 있는 사람,
어제는 내가 없기에 고민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내가 없기에 고민인 그 사람의 숙명은 쉽게 지켜보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두를 높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관망하는 자가 되지만 이로 인한 그 이의 아픔은 함께 그들과 흐름 속에 몰입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이다. 그이는 내가 없기에 모두가 될 수 있고 그렇기에 모두를 사랑하는 눈으로 바라봐줄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들과 함께 느끼는 지점에 대한 어려움이 있다. 그러기에 그는 늘 고독하다. 그리고 남들은 이런 그를 모른다는 것이다. 모르지만 가슴으로는 그가 얼마나 자신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기에 사랑과 위로를 밖에서 찾는 사람일수록 그는 쉽게 불러지는 사람이 되었다. 그이를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로.
나는 그와 정반대다. 내가 강한 사람의 숙명은 내가 강하기에 남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강한 사람의 숙명은 내 안의 모든 캐릭터에 대해 몰입이 쉽고 잘 느낀다. 반면 그렇기에 이 사람의 고민은 타인에게 맞추는 것이 어렵다. 하나하나를 자신에게 타고나게 몰입하는 나를 가지고 이 사회에 들어가 버리면 나의 존재가 강할수록 타인의 존재를 선명히 분리된 채로 느끼기에 온전히 타인을 이해하는 게 어려운 것이다. ‘저 사람 왜 저래’, '내가 생생히 느끼는 이것이 맞는데 이해할 수 없어.’가 너무 쉬워버리 게 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혼자서 외로워진다.
둘 다 자기대로 살다가 철저히 혼자가 되기 딱 좋은 숙명이다. 그는 관망함으로써 멀어지는 자로 나는 내게 몰입함으로써 멀어지는 자로. 우리가 연대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었다. 그는 나를 통해 하나하나 느끼는 것을 배우고 나는 그를 통해 지켜보는 자가 되어가며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
그런데 참 재밌는 것은 내가 없다고 고민인 그 사람은 누구보다 내가 있기에 내가 없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리고 그런 그를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얼마나 무섭고 힘이 있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었는데. 모두를 관망할 수 있는 그 힘은 모두가 될 수 있는 결국 그 자신, '자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를 몰랐다. 처음으로 존재로서의 널 알게 되었다. 한편 이를 역으로 내게 돌려오면 내게도 성립한다. 나도 누구보다 내가 없기에 누구보다 내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우리 둘은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구나.
이것이 지난한 과정 동안 우리가 배워왔던 것이구나. 내가 나로 온전히 존재할 때, 즉 강한 나로 그냥 살고 있을 때 너는 그걸 통해 너로 서는 걸 배우고 너는 너로 온전히 존재하며, 너를 사라지게 하며 나는 내가 사라지는 것을 배워왔던 것이구나. 이제야 널, 우리를 안다. 그리고 또 알았다. 내가 없다고 고민하는 이와 내가 강해서 고민하는 이, 아니 고민해야지 전에 먼저 시작되는 아픔의 연료는 결국 사랑이라는 것을. 그 사랑의 범위에 대한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같은 길, 같은 방향, 그 흐름을 나아가게 하는 힘엔 사랑이 있구나. 각자를 죽여가며 넓어지는 길엔 결국 나, 사람, 사회에 대한 사랑 돌려와 다시 그러면서 자신을 긍정하며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