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들
거리 한구석에 책과 잡지, 잡다한 물건들이 진열돼 있다. 특별한 책들은 종이상자에, 잡다한 물건들은 플라스틱 (우유박스)박스에 담겨 있다.
종이박스를 찢어 가게상호를 걸었다. ‘빨간책방’이라 빨간색으로 삐뚤빼뚤 적어 놓고, 그 밑으로는 검정 글씨로 ‘대여도 가능’이라고 적었다. 물건들 중에는 낡은 통기타가 거치대에 놓여 있기도 하고, 벨라스케스와 샤갈의 복사본 그림도 보면대에 놓여 있다. 또 이와는 대조적으로 선정적인 서양 금발 모델의 비키니 포스터도 미술품처럼 전시돼 있다.
빨간책방 주인(민교)은 30대 중반 청년으로 긴 머리를 하고 있고, 헐렁한 체 게바라 티셔츠에 청바지, 지저분한 스니커즈를 신고 있다. 그는 가판대 뒤에서 낚시용 의자에 앉아 책들을 정리하고 있다. 헤드셋을 끼고 있는데, 비트가 강한 음악이 밖으로까지 들려온다. (참고로 그는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다. 다리를 절며 걷는다.)
서류가방을 든 정장 차림의 남자가 가판에 멈춰 선다. 진열된 책들을 건성건성 들춰보다가 주인에게 말을 건다.
남자 더 좋은 거 없어?
책방주인은 남자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책 정리에 몰입 중이다. 중년의 남자, 주인의 어깨를 툭툭 친다.
남자 이봐! 더 좋은 거 없냐구?
민교 (헤드셋을 빼고) 네?
남자 더 쎈 거 있냐고? 더 쎄근한 거?
민교 (책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요?
남자 (지갑을 꺼내 만 원 짜리 지폐 한 장 꺼내며) 자, 자~
민교 이러시면 안되는데….
민교는 몸을 돌려 숨겨둔 상자에서 옛 ‘썬데이서울’ 잡지와 포르노 잡지 한 권을 꺼내 남자에게 건네준다. 남자 가방에 책들을 넣고 유유히 사라진다. 민교는 받은 돈을 허리에 찬 복대에 넣고 다시 하던 일에 열중한다.
부랑자1이 아주 천천히 다가온다. 그 뒤로 부랑자 2가 아주 빠른 걸음으로 부랑자1을 추월해 진열대에 있는 책을 바로 집어든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부랑자2 오~예~ 아 갓 잇!
민교 오셨네요.
부랑자2 김사서, 심봤다! 가져갈게.
민교 칸트 노리는 분들이 많은데 운 좋으시네요.
부랑자2 (내밀며) 포장해줘!
민교 넵! 분부대로 하지요.
민교, 깨끗한 신문지로 책을 한 번 감싸 포장한다. 검정봉투에 책을 넣어준다.
민교 봉투값은 안 받을게요. VIP시니까~
민교, 부랑자2에게 손을 내민다. 부랑자2, 귤 두 개와 담배 한 개비를 건넨다.
민교 손님, 아니 형님! 이러시면 안 되는 거 아시잖아요. 에누리 없습니다. 거래는 거래, 딜 이즈 딜! 현금이요.
부랑자2 천혜향이야. 그냥 귤 아니다 이거.
민교 귀한 책인데 이러시면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부랑자2 그래 그래. 잘 알지! 나만큼 작가에게 예를 표하는 사람이 어딨다고?! 요즘 경기 안 좋은 거 알잖아~ 오늘 코스피지수 봤어?
민교 그럼요. 그러니까 현금!
부랑자2 일단 천혜향 먹어보고 얘기해봐! 맛이 기가막힌다잉~ 천천히 걸어오던 부랑자1, 도착하더니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이 천 원을 꺼내 민교에게 내민다. 민교가 지폐를 받으려고 하자 부랑자2가 제지한다.
민교 아이고 감사!
부랑자2 어허 김사서, 상도덕이 썅도덕이 되면 안 되지.
민교 제 말이요, 제 입장에서는 현찰이 무조건 더 좋습니다. 현찰이래야 거래죠. 정직한 상거래.
부랑자2 신자유주의의 노예 같은 새끼!
민교 이번 주엔 고기 좀 먹을려고요.
부랑자2는 민교가 받으려던 돈을 낚아채 부랑자1의 면상에 던진다. 바닥으로 돈이 떨어진다. 부랑자1은 별 반응 없이 떨어진 돈을 줍는다. 부랑자2는 앞에서 얼쩡대는 모습도 보기 싫어 부랑자1을 매정하게 밀친다. 부랑자1 넘어진다.
부랑자2는 신발을 벗더니 시커먼 양말에서 2천 원을 꺼내서 민교에게 건넨다. 민교는 악취 때문에 집게로 돈을 받는다. 받았던 천혜향과 담배를 다시 돌려준다. 부랑자2는 천혜향은 받고 담배는 거절한다.
부랑자2 담배 줬다 뺐는 거 아니다. 펴! 진짜 오늘 운수대통이다, 김사서!
민교 암요. 그렇다고 파고다 형님에게 돈 던지시고 그러시면….
넘어진 부랑자1은 멍한 표정이다.
부랑자2 (부랑자1을 향해 혀를 차며) 저 꼬라지 봐! 어차피 약육강식, 혼자 사는 세상이야. LTE, 아니지, 5G 터지는 세상에서 느려 터져 가지고! 김사서, 나 간다잉~
부랑자2 떠난다.
민교 또 언제 오세요?
부랑자2 꼴리는 대로. 이틀 있다가 나 출장 있어. 그니까 좋은 책 있음 잘 챙겨놔!
민교 집회 가세요?
부랑자2 업무상 비밀!
민교,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부랑자1을 일으켜 세운다.
민교 너무 낙심마세요. 좋은 책 많으니까.
부랑자1 칸트!
민교 난감하네요. (잠시 생각하다) 파고다 형님! 요 책들은 어떠세요? 발터 벤야민, 애덤 스미스…
부랑자1 칸트!
부랑자1 고개 젓는다.
민교 니체! 니체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부랑자1 고개 젓는다.
민교 설마 니체인데요?! 아니면 최인훈? 김훈 작가는요?
부랑자1 고개 젓는다.
민교 (책 보여주며) 이건 어떠세요? 현대미술과 에로스!
부랑자1 잠시 고민하며 표지를 보다가 고개를 젓는다.
부랑자1 칸. 트.
민교 양보가 없으시네. (상자에서 책들을 뒤지다 한 권을 꺼내며) 짜잔! 칸트 나왔습니다. ‘실천이성비판’.
부랑자1, 반기며 고개를 끄덕인다.
민교 취향 확실하시네. ‘순수이성비판’은 제가 한 번 구해볼게요. 자, 받으시고. 포장할까요?
부랑자1 하지 마. 그냥. 그냥.
부랑자1이 2천원을 내밀자 민교가 한 장만 받는다. 그러자 부랑자1이 안된다며 다 받으라고 한다.
민교 철저하셔. 형님은 진심 훌륭하세요. 뿌듯하다.
부랑자1이 알사탕을 까서 민교에게 준다. 민교 받아서 먹는다. 부랑자1도 알사탕을 까서 먹고는 가판 뒤편에 벤치 쪽으로 천천히 간다.
부랑자3 등장한다. 불만 가득 찬 표정으로 와서 가져온 책을 민교에게 내민다. 그 사이, 부랑자2는 천천히 걸어가 벤치에 앉는다. 앉더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다.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쿠오바디스! 쿠오바디스!’라 외친다.
부랑자3 이런 개꼴통 시끼가 학자야?!! 이러니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지. 기자는 기레기, 학자는 개꼴통.
민교 왜요?
부랑자3 이런 걸 경제전망이라고! 와아~ 진짜 맨날 야동만 보고 살아도 이거보단 낫겠다. (책을 거칠게 움켜쥐며) 이게 책이야, 쓰레기야?! 난 구분을 못하겠어.
민교 어제 오늘 일인가요, 뭐.
부랑자3 짝퉁들.
민교 진정하시고. 커피 한 잔 드려요?
부랑자3 콜! 김사서, 냉커피 한 잔 찐하게~
민교 얼음 없습니다.
부랑자3 어이 김사서! 투자 좀 해!
민교 책 좀 사세요! 맨날 대여만 하시지 마시고요.
부랑자3 충동적으로 구매할 수는 없잖아. 경기도 불경기인데… 요즘 책들에는 영혼이 없어, 영혼이. 김사서! 칸트는?
민교 (보온병에서 물 따라 믹스커피 타면서) 오늘 난리네. 이미 완판입니다.
부랑자3 뭐?! 완판!? 김사서, 이제 예약제 하면 안돼?
민교 안됩니다.
부랑자3 잘났다. 지렁이 똥구멍만한 가게에서 원칙은 무슨, 그럼 괴테는?
민교 그건 어제 노가리 형님이 대여해 가셨어요.
부랑자3 김, 내 생각은 안 해! 이럴 거야?
민교 죄송합니다. 자, 커피 한 잔 하세요!
부랑자3 (한 모금 조심스레 들이키고는) 니미 커피는 잘 타. 바리스타야 바리스타. 스타뻑스인지, 스타빡스인지 저것들 보다 니가 훨 낫다. 저기 커피는 너~~~~~무 써! 그게 한약이지 커피야?!!
민교 아이고 감사합니다. 역시 맛을 아셔!
부랑자3 그람 그람. 이래뵈도 내가 7성급 호텔도 막 드나들 던 사람인데.
민교 딱 보면 그런 티가 나요.
부랑자3 뭔 티?
민교 귀티.
부랑자3 맛이 좋아. 김, 오늘도 수고하자!
부랑자3은 커피를 들고 빨간책방 옆에 신문을 깔고 자리를 잡는다. 성경책과 노트 꺼낸다.
민교 신약 시작하시네요. 마태복음.
부랑자3 할 껀 해야지. 아침에 바빴어. 방해하지 말고 일해.
민교 수고하세요.
부랑자3 (성경 펴고 혼잣말 중얼거린다) 마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독생자를….’
부랑자3 성경구절들을 중얼거리며 베껴 쓰기 시작한다.
잠시 후,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는 직장 여성이 (스타벅스)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가판 앞에 멈춰 선다. 진열된 책들을 훑어본다. 일반서점처럼 자연스럽게 훑어본다. (이때 무대 한편에 중년남자가 등장하더니 멈춰 선다. 멈춰 선 자리에서 뒷걸음질을 하더니 일정한 거리를 두고 빨간 책방을 바라본다)
여자고객 (맥심 잡지를 집어들며) 얼마죠?
민교 잡지는 3천 원입니다.
여자고객 비싸.
민교 비교적 최신잡지고 어디 보자, 여름특별판이라 볼 게 많네요. 빅토리아 시크릿에서 제시하는 여름밤 파티의상 콜렉션에, 샤샤 그리스 화보집도 있고….
여자고객 샤샤?
민교 죄송한대 4천 원 해야겠네요. 죄송합니다. 말하다 보니 핫하네요. (혼잣말로) 이거 팔지 말 까?
여자고객 어이없네. 여기 카드 되죠?
민교 거기도 어이없네요. 안됩니다. 카드!
여자고객 그럼 카뱅은요?
민교 카뱅?
여자고객 카카오뱅크.
민교 안됩니다.
여자고객 요즘 떡볶이, 호떡가게도 카드 받거든요.
민교 고객님, 거리에서는요, 카드 안됩니다. 여긴 현찰 월드입니다.
여자고객 (작은 소리로) 뭐래~ 원시인!
민교 맞아요, 원시인! 이거 보세요. (잡지 하나 집어 페이지들 보여주며) 보이시죠? 야생 그대로 아닙니까!
여자고객, 짜증 난 표정으로 손가방을 열어 뒤진다. 지갑을 찾는데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이것저것 넣다 뺐다 하다가 오천 원 지폐를 건넨다.
민교 여기 거스름돈이요.
여자 고객 그냥 간다. 민교는 가는 여자를 잡아 손에 잔돈을 쥐어준다.
민교 돈 우습게 보면 안됩니다.
여자고객 아~ 짜증나!
여자 고객 떠난다.
민교 (고개 절래절래 흔들며) 이 직업도 알고 보면 감정노동이야. 어우 재수 없어!
민교, 소금을 찾아 거리에 뿌린다. 뿌리다 누군가의 구두에 소금을 뿌리게 된다. 그 남자는 민교를 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