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속에 토끼 12

12. 껌딱지

by 황은화

친구에게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문자나 카톡이 아닌 편지가 현관 신발장에 올려져 있습니다.

친구의 집주소와 자신의 집주소가 적힌 편지 한 통. 새삼 친구의 집 주소가 낯설게 다가옵니다.

'동네이름이 이랬나?'


"00아! 나 떠나! 떠나기로 했어! 빠리에 대해서도, 그림에 대해서도 미련이 있었는데 그냥 해보려고 ^^

그런데 파리에 있지 않을 수도 있고, 그림이 아닌 제빵이나 와인공부를 할 지도 몰라. 그냥 가는 거야.

가서 상황 돌아가는 거 보면서 그거에 맞춰 살아보려고! 한 마디로 딱히 계획은 없단 말씀! 하하하!


막연히 '가야지, 가야지, 언젠가는 가고 말거야' 하다가 서른이 코앞, 비상이야! 2년 전부터 떠나려고 했는데, 덜컥 겁부터 나는 거야. 언어공부며, 돈이며, 성공에 대한 확신도 없고, 집안일에 뭐에 핑계댈 이유가 즐비했지. 엄청 쪼그라져 버렸지.

그런데 이렇게 멍하니 아무 것도 안 하고 사는 게 더 겁이 나더라구. 그래서 떠나기로 했어. 잘했지?!! 그래도 너무 실망하지 말거라. 몇 달 만에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ㅋㅋㅋ 암튼, 뭐든 하기로 마음 먹었어. 어때? 나 답지 않아?!! 존나 쿨하지!


있잖아, 00아!

우리 중2때 만나 친구 됐잖아. 너 근데, 우리가 왜 친구가 됐는지는 아냐? 기억은 하시려나~~~

네가 내 뒷꿈치에 붙은 껌 떼줘서 친하게 됐잖아. 생전 알지도 못하는 애가 뒤에서 소리를 박박 질렀지. '움직이지 마! 꼼짝 마!'하면서 말야. 황당, 그 잡채였지. 그러더니 뒤로 돌아보지 말라 하면서 지뢰 제거라도 하는 군인처럼 조심스럽게 뒷꿈치로 다가와 신발로 껌을 밟아서 떼려고 하는 거야. 뭐가 뭔지 몰라 몇 초 식겁했어. 대체 뭘 하는 거지? 일진이야? 강도야?

알고 보니 신발로 밟아서 껌을 떼려고 하는데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아 끙끙댔지. 결국은 내 신발을 벗기더라. 허락도 받지 않고 않고 말야. 신발을 벗기더니 막대기로 제거에 성공하고 말았지. 그때의 네 표정이란 참... 얼마나 뿌듯해하던지. 그때 내가 얼마나 웃었는줄 아냐? 니 신발에 더 큰 껌이 붙어 있었거든. 넌 그런 얘였어.


하지만 이건 황당한 에피소드에 가깝고 진짜루 내가 너와 친구가 된 이유는 말야. 네가 멋있어서였어. 넌 진짜 멋있었어. 뭐든지 해보고, 실패해도 쿨하게 돌아서고, 도전도 빠르고 포기도 겁나 빠르고 좋아하는 것도 많고 달리기도 잘하고 유머감각도 훌륭했어. 그래서 난 친구가 됐어. 같이 있으면 무조건 즐거웠고 너 같이 돼고 싶었어. 늘 그랬어. 너는 알고 있으려나? ㅋㅋㅋ


근데 요즘의 너는 다른 사람 같아. 내가 알던 너가 아니야.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여유가 없어졌어. 늘 바쁜 사람이 됐지. 여유만 없어진 게 아니었고 자신감도 없어지고, 자꾸 네 의견이 아닌 남의 의견을 물어보기 시작했어.

예전에 너는 다른 사람의 생각 따위 관심도 없었어. 그래서 아무 것도 물어보지 않았거든. 그런 네가 요즈음은 그렇지가 않아.


00아, 난 네가 너로 돌아왔으면 해. 너답게 말야. 너, 진짜 멋있었으니까!

친구로서 나는 그 모습이 그리워. 열심히 사는 네게 초치는 건 아니고, 이 언니가 다 깊이 생각해 보고 말하는 거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 마라. 죽는다!!! 스피아 민트 껌 같은 년아! 내 껌딱지야!


각오해. 난 더 멋있어져 올 테니까. 그러니 그때까지 건강하고, 너의 토끼도 건강하고 더 멋져지렴. 아니 너 답게~ 그냥 너 답게 있어. 그거면 딱이야! 우리 잘 버티자!

암튼 언니는 간다아~ 빠리로~~ 안녕~~~ 메롱~~~~~ :)-"


2019년 가을, 서울에서 소희가...




그녀는 친구의 편지를 가슴에 품습니다. 벌써부터 친구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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