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난 이럴 때만 말을 잘 들어 쳐먹는 아이
허 씨가 준 족발을 채 소화하기도 전에, 술에 취한 아버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는 허둥대는 닭처럼 집안을 돌아다녔다. 그녀는 또 감당하기 어려운 빚을 진 상태였고, 아버지는 뒤늦게 이를 알고 분개했다. 칼 같은 날카로운 물건들을 숨겨야 했다. 실제로 아버지는 어머니를 칼로 찌르곤 했다. 취기에 저지른 실수라고 주장했지만, 매번 힘을 조절하여 피부만 살짝 베는 그의 정교함은 실수보단 실력이었다. 난 도통 울지 않는 아이였는데 이 날 흉기를 숨기면서는 눈물이 고였다. 치과 예약일이 다가오듯 불가피한 절망이 예고된 상태였다.
집 근처에 소희를 자주 돌봐주는 보모가 있었다. 어머니는 소희를 그녀에게 맡겼다. 나에게는 서우와 내 옷 등 간단한 짐을 챙기라고 했다. 피신하려는 것이었다. 동생들이 태어나기 전부터도 여러 번 있던 일이었다. 그녀는 혼자 가출하는 일이 빈번했지만 상황이 유독 심각할 때면 우리를 데리고 나갔다. 밤이 되자 아버지가 돌아왔다. 걸음도 겨우 걸을 정도로 취해있었다. 다행히 그는 문지방을 넘자마자 잠들었다.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어머니는 그의 옷을 뒤져 돈을 모두 챙겼다. 그래 봐야 만 원짜리 몇 장뿐이었다.
어머니에게는 방부제를 모아놓은 컵이 있었다. 종종 나와 아버지에게 보여주며 자신이 먹고 죽을 약이니 잘 봐두라고 위협했다. 이 날이 오기 전까진 그저 그런 용도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찌개에 방부제를 털어 넣었다. 이어 내게 다가왔다. 턱을 잡고 고개를 들어 올려 눈을 맞춘 다음, 입을 지퍼처럼 잠그는 시늉을 했다. 나는 그 동작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골똘히 생각하다가 직접 물었다. 『에이씨, 다 큰 년이 눈치도 없어. 닥치고 가만히나 있어!』 우린 아버지가 깰까 봐 거의 숨소리만으로 대화했는데도 그녀의 입김은 공격적이었다. 어머니와 서우는 준비를 마치고 신을 신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숨을 죽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너 뭐 하냐 지금?』 어머니는 답답한 듯 물었다. 난 대답을 할지 말지 갈팡질팡했다.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이제와 어겨야 하나 고민했다. 어머니는 그새를 못 참고 헬멧을 집어 내 머리를 후려쳤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조용히 하라며 검지를 펼쳤다. 어차피 나도 아버지가 깰까 봐 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다. 그제야 가방을 메고 따라나섰다. 차가운 밤공기가 피부를 에는 듯했다. 어머니는 내 머리카락을 쥐고 무자비하게 흔들었다. 술 냄새 때문인지, 헬멧으로 맞아서인지, 거칠게 휘둘려서인지 어쨌든 어지러웠다. 그녀가 화난 이유는 내가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 정말 닥치고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다. 일생 동안 이런 실수를 수도 없이 저질렀다. 어릴 적 비슷한 상황에서 자주 듣던 말은 『평소에는 말을 지지리도 안 들으면서, 이럴 때만 잘 들어 쳐 먹어.』 와 같은 말이었다. 억울함에 복장이 꽉 막혔다. 아마 반대편 입장도 그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