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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그레이 Jul 08. 2024

노숙 가족, 결혼식 뷔페 도둑이 되다

18. 집 곳곳에는 빨간 스티커


이전 이야기 : 집 근처에 소희를 자주 돌봐주는 보모가 있었다. 어머니는 소희를 그녀에게 맡겼다. 나에게는 서우와 내 옷 등 간단한 짐을 챙기라고 했다. 피신하려는 것이었다. 동생들이 태어나기 전부터도 여러 번 있던 일이었다. 그녀는 혼자 가출하는 일이 빈번했지만 상황이 유독 심각할 때면 우리를 데리고 나갔다. 밤이 되자 아버지가 돌아왔다. 걸음도 겨우 걸을 정도로 취해있었다. 다행히 그는 문지방을 넘자마자 잠들었다.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어머니는 그의 옷을 뒤져 돈을 모두 챙겼다. 그래 봐야 만 원짜리 몇 장뿐이었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J 대학병원이었다. 더 어릴 적에는 수술실 앞 보호자 대기실에서 머물곤 했다. 이제 그곳은 사라지고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우리는 응급실로 들어섰다. 수거함을 휘적거려 서우에게 맞는 환자복을 찾아 입혔다. 그를 휠체어에 태우고 병원 본관으로 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아다녔다. 주황색 보조등 불빛만이 지배하는 텅 빈 층을 발견했다. 서우는 이미 휠체어에서 잠들어 있었다. 나는 기다란 의자에 몸을 뉘었다. 오렌지 빛이 검은 물결을 가르며 룸바를 추었다. 황홀한 꿈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흔들리는 불빛을 보기 위해 계속해서 눈을 깜빡거렸다.

「검둥개야 짖지 마라...」 어머니는 내 등을 쓸어내리며 귀를 적셨다. 좁다란 의자 위 몸은 불편해도, 나는 고속도로 옆길에 핀 코스모스였다.


잠시 눈을 붙이고 나니 창 밖으로 해가 중천이었다. 서우를 제 옷으로 갈아입히고 거리로 나섰다. 우리는 버스 정류장 몇 개를 지나칠 정도로 오래 걸었다.


종착지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화려한 건물이었다. 어머니는 그곳 모든 사람에게 예를 차려 인사했다. 자신을 누군가의 친척이라고 소개했다. 처음 보는 이들에게 친척 행세를 하는 것을 보니 괴리감이 느껴졌다.

반질반질한 양복을 입은 남자가 명함크기의 종이를 세 장 주었다. 우리는 지하로 내려가 종이에 도장을 받고 들어갔다. 모르는 사람의 결혼식 뷔페 연회장이었다.


무사히 식사를 마치고 나왔다. 어머니는 담배 두 개비를 사 화단에 걸터앉아 피웠다. 반정도 태운 꽁초를 탁탁 털어 가방에 챙긴 그녀는 내게 버스비를 쥐여주었다. 서우를 데리고 집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돈을 집어던지고 방방 뛰며 울었다. 어머니를 영영 볼 수 없을까 봐 두려웠다. 그녀는 두 밤만 자고 오겠다고 약속했다. 그 말을 믿고 서우와 함께 버스에 올랐다.


이끌어주는 사람 없이 버스에 타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려야 할 정류장 이름을 계속 되뇌었다. 버스 안내 방송은 온통 웅웅 거리기만 했고,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모든 신경을 집중하면 잠시 들렸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저 소음일 뿐이었다. 이 때문에 내릴 곳을 한참 지나쳐 종점에 도착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가 데리러 왔다. 나와 서우는 꼬질꼬질했다. 아버지는 한숨을 푹 쉬었다. 시멘트가 덕지덕지한 그의 작업복 차림이나, 눈물 자국 검게 새겨진 우리 꼴이나 도긴개긴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를 만나니 마음이 놓였다. 미워도 아버지는 아버지였다. 오토바이를 타고 집에 도착했다. 배가 고프냐는 물음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는 어찌 됐든 중국집에 전화를 걸었다. 나와 서우는 짜장면 그릇에 코를 박고 울었다.


며칠 뒤 할머니가 동생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어머니의 행방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일축했다. 나는 아버지와 단둘이 집에 남겨졌다. 할머니 집은 부산이라 동생들을 보러 갈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가끔 나를 일터에 데려갔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혼자 집에서 보냈다.

나는 평소에 소화가 잘되지 않고 자주 복통을 겪었다. 긴장하거나 기분이 안 좋을 때도 배가 아팠다. 보통은 상태가 심각해질 때까지 아프다는 말을 잘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는 정서가 불안정해서인지 사소한 통증에도 아버지를 호출했다. 그는 일을 멈추고 여지없이 집으로 달려왔다. 그를 마주하면 구토가 나오면서 속이 나아졌다. 심지어 아프지 않을 때도 그가 도착하면 구토를 했다. 그가 역겹기 때문은 아니었다.


며칠이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낯선 사람들이 대문을 두드렸다. 나는 어리고 혼자 있기 때문에 문을 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미 어머니에게 연락했다며 설득을 시도했다. 나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지만, 문을 부수려 해서 어쩔 수 없이 열어주었다. 그들은 막무가내로 들이닥쳐 가구와 물건마다 빨간 스티커를 붙였다. 채무자가 빚을 갚지 않으면 재산을 가져가겠다는 자산압류 스티커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강제 집행이었다. 스티커를 제거하면 부모님이 감옥에 갈 것이라며 건드리지 말라는 협박까지 했다. 하나같이 인상이며 말투가 꽤 사나웠다.

아버지에게 전화로 상황을 설명했다. 전화기 너머로 그의 욕설이 난무했다. 한동안 집안 곳곳에 붙은 스티커들과 함께 생활했다. 아버지는 일을 마치고 돌아와 술 마시다 잠들기 일쑤였다.


부모님은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일요일마다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교회에 갔다. 그날만큼은 평소와 다른 사람 같았다. 나는 그들의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교회에 다녔다. 일요일이 오는 것이 늘 싫었다.

사실 나는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신을 만나고 싶었다. 내가 아는 유일한 신이었던 하나님을 믿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내 기도를 들어준 적도 없었다. 그분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납득시켜 줄 사람도 없었다. 나는 진정으로 믿기 위해 왜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던졌다 그럴 때마다 모두—주일학교 교사, 집사, 권사, 전도사, 장로, 목사—나를 악마의 씨앗처럼 바라보았다. 간단한 몇 개의 질문에는 답을 해주었지만, 결국에는 「그냥, 믿으면 돼, 그래야 하는 거야」라며 짜증스러운 티를 냈다. 그들의 굳건한 믿음에 비해 「그냥」이라는 말은 너무 무책임하고 성의가 없었다. 그들의 답변에서 안도감을 찾을 수 없었다. 믿음을 강요당하면서도 진정한 신앙의 본질을 찾지 못했다. 이 모순 속에서 점점 더 깊은 회의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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