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반대편에서 온 남자.. 나와 닮을 사람을 만나다.
나는 보수적인 조직에서 근무했던 만큼, 성격 자체가 원칙적이고 약간은 사차원적인 면이 있으며, 한편으로는 감성주의자이기도 하다. 남편을 처음 만난 계기는 그가 한국으로 역이민을 준비하며, SNU졸업생으로서 미국 내 재단을 통해 모교에 기부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의도한 인연은 아니었다. 그는 순수하게 자신의 모교를 후원하고자 했고, 한국 정착을 시작하며 타 대학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본교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자 연락을 해온 것이다. 당시 나는 SNU직원으로 SNUH에서 Private Healthcare Coordinator로 근무 중이었다.
6월, 여름의 시작 무렵이었고, 그의 진료일은 월요일이었다. 나는 그 주 금요일, 사전 안내차 전화를 드리게 되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정중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남편은 이후 내가 문자로 진료 관련 정보를 정리해 보낸 것에 대해, “의무적인 전달이 아닌 정성 어린 배려로 느껴졌다”고 했다.
그와 처음 만났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의 첫인상은 합리적인 성격 그대로 베이지톤의 여름 재킷에 짙은 색 정장 바지를 입고, 낡은 ‘한상대회(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 가방을 들고 있었던 모습이었다. 가방 안에는 교회에서 받은 물티슈가 들어 있었다. 그는 말수가 적었고, 조용했으며, 대화와 대화를 잇는 능력이 있었다.
그날, 병원 본관 앞에 택시에서 내린 그는 놀란 얼굴이었다.
“자기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나를 이렇게 정확히 알아보지?”
그는 그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환한 미소로 그를 맞았다.
병원 1층에서 서류를 접수하고 진료실로 향하던 중, 그는 내게 물었다.
“어떻게 제가 타고 있던 택시를 알아보셨나요? 혹시 제 얼굴을 미리 보신 건가요?”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선생님께서 택시를 타고 오신다고 하셔서 30분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택시에서 내리시는 분들을 유심히 지켜봤어요. 직감적으로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오직 ‘느낌’이었습니다.”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어떻게 불러드리면 편하실까요? 지금처럼 ‘선생님’으로 불러드리는 게 괜찮으신지요? 그리고 진료는 혼자 들어가시는 게 편하신가요, 아니면 제가 함께 들어가도 괜찮으신가요?”
그는 나의 태도에서 ‘배려’와 ‘전문성’을 느꼈다고 한다. 나중에서야 그는 내가 병원 경력자이며 의료 코디네이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료가 끝난 뒤 여러 검사를 받느라 한 시간가량 함께 있었고,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대학과 병원 이야기, 그리고 내가 미술관을 자주 간다는 취미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그림을 좋아하고, 보는 눈이 깊고 섬세하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에게도 자연스레 내 그림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기억하는 나의 첫인상은 이랬다고 한다.
작고 아담한 체형, 깔끔한 흰 블라우스에 남색 치마, 그리고 단정한 헤어스타일.
일본인인가 싶을 정도로 정중하고 조용하면서도, 세심한 배려심이 묻어나는 사람이었다고.
며칠 후, 그는 조심스레 문자로 물었다.
“좋은 전시가 있다면, 함께 가서 그림 설명도 들을 수 있을까요?”
나는 웃으며 답장했다.
“그럼요, 이번 주 토요일에 시립미술관에서 이인성 화백의 전시가 있어요. 그날 뵙죠.”
토요일, 서울시립미술관 앞.
그는 정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그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날 우리는 이인성 화백의 그림 앞에 나란히 섰다.
나는 늘 하던 대로, 그림의 시대적 배경과 작가의 삶, 색채감과 붓 터치의 깊이를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집중했다.
무언가를 배우려는 사람의 태도는 언제나 상대를 존중하게 만든다.
그날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전시를 마친 후 우리는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걸었다.
걷는 동안에도 그는 말이 많지 않았지만, 눈빛은 늘 상대방에게 집중돼 있었다. 나는 그의 회색빛 눈동자에서 탐험가 같은 시선을 느꼈고, 그런 진중한 시선이 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저녁은 을지로의 단골 고깃집, ‘오륙도’에서 먹었다.
지하철역에서 헤어질 무렵, 그는 나와 같은 방향으로 2호선을 타고 가다가, 내가 환승해야 할 역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의 인사는 깔끔했고, 배웅하는 눈빛은 조용한 배려를 담고 있었다.
나는 이 남자가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세계를 지켜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느낀 그의 첫 번째 진짜 인상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내 마음속에 ‘탐험가의 눈을 가진 남자’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는 나를 만나기 8년 전, 백인 전처와 이혼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성이었다. 나는 그녀를 속으로 ‘반짝이 아줌마’라고 불렀다. 그만큼 눈에 띄는 미인이었고, 반짝반짝 빛이 났다.
오랜 시간 혼자 지낸 그는 집안일엔 그다지 능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 도우미의 도움을 받아 살고 있었고 한국에 온 뒤에는 시니어타운의 서비스로 정리된 삶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그가 늘 먼저 연락했는데, 신기하게도, 그의 연락은 늘 ‘금요일 오후 3시’였다. 익숙해질 만큼 정확한 시간, 마치 누군가의 심장박동처럼 규칙적인 그 시간에 그는 안부를 묻는 문자나 전화를 걸어왔다.
만나지 않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기에, 그의 연락은 늘 반가웠다.
나는 그가 연락하지 않아도 기다렸고, 그는 어쩌면 그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겨울, 그의 침구에 묶는 끈이 다 끊어져 당황한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건 변명뿐이었다. 거절당한 그가 고민 끝에 내게 SOS를 보냈고, 나는 고민도 없이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날은 눈이 내리던 추운 겨울,
머리를 말릴 틈도 없이 젖은 머리를 모자에 욱여넣고
외할머니께 물려받은 30년 된 바느질고리를 들고 그의 집으로 달려갔다.
나는 늘 그랬다.
그가 가장 힘들고 외로울 때,
그가 건강에 이상을 느꼈을 때,
무엇보다도 마음이 허할 때—
나는 그의 앞에 조용히 나타났다.
수호천사처럼.
나는 늘 그를 최우선에 두었다.
사람들은 ‘조건’이나 ‘보장’을 이야기했겠지만,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그 사람이라서였다.
그는 어느 날, 조심스럽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나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그 결혼이 실패하게 된다면… 그때, 40살이 되어도 여전히 혼자라면, 그때 나에게 오면 어떨까요?”
그 말을 들은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하지만 곧, 또렷하게 말했다.
“지금의 나도, 40살의 나도 같은 사람이에요. 나는 오늘도 여전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모든 걸 포기하고 갈 수 있지만, 당신은 잃는 걸 두려워하고 있군요. 하지만 모든 사람이 변하는 건 아니에요. 나 같은 사람도 있답니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 단호함과 맑은 확신이 그의 마음을 흔든 것이다.
이후, 우리의 만남은 조금씩 달라졌다. 그는 더 자주 나를 찾았고, 나는 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가 필요로 하는 순간에 옆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고통을 호소하던 새벽. 나는 밤을 지새우며 간호를 했고, 그날 아침, 출근을 위해 집으로 돌아서는 나를 향해 그는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과 나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이 너무 깊어서, 너무 진심 같아서.
그리고 사흘 뒤, 나는 그의 집을 찾았다.
그는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고,
나는 다가가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우리 함께 살아요.”
그의 말처럼, 소울메이트를 만난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다. 가치관이 닮았고, 사고의 흐름이 비슷하며, 무엇보다도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는 관계, 우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용기와 그의 결단이 만나, 우리는 마침내 부부가 되었다. 결혼을 결심했을 때, 나는 가장 먼저 둘째 언니를 찾아갔다. 그녀는 내가 가장 신뢰하는 가족이었고, 나의 선택에 중요한 판단자가 되어줄 사람이었다.
“언니, 나 그 사람을 따라가려 해.”
내 말을 듣던 언니는 한참을 조용히 있다가 말했다.
“그래? 네 선택이라면 믿을게. 하지만 부모님은 많이 놀라실 거야. 당연히 반대하실 거고… 그걸 견딜 수 있을 만큼, 넌 그 사람을 사랑하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그는 나와 닮았어.
왜 내가 오랫동안 누군가를 기다려왔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어. 그는 나의 소울메이트야.”
언니와 헤어져 지하철역을 향해 가던 중, 언니가 나를 다시 불러 세우며 물었다.
“그는 너를 많이 아끼니? 정말 많이 사랑하니?”
나는 미소 지으며, 짧고 확실하게 답했다.
“응. 그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결혼까지는 쉽지 않았다.
부모님의 반대는 예상보다 컸고, 엄마는 뇌경색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그 일로 결혼은 1년 미뤄졌고,
그 사이 우리는 한국 속초에 머물며 둘째 언니 부부와 종종 만났다.
해군장교 출신이었던 형부와 남편은 대화가 잘 통했다. 형부가 해군사관학교 교수로 부임하자 우리를 초청했고, 우리는 진해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가족 같은 교감을 쌓았다.
그리고 마침내,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씩 돌릴 수 있었고, 그 도움을 준 건 둘째 언니 부부였다.
결국, 부모님이 함께 미국으로 와주셨고, 우리는 로스앤젤레스의 조나단 클럽(Jonathan Club)에서 소박하지만 따뜻한 스몰 웨딩을 올릴 수 있었다.
결혼식 당일, 나는 둘째 언니가 준비해 준 웨딩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웃었다.
우리 둘, 각각 79세와 29세. 무려 50년의 나이 차이.
하지만 이상하게도, 남편은 그때도 29세의 청년처럼 열정적이었고, 14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마치 나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평범한 중년의 남자처럼 느껴진다.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의 설렘,
AI ChatGPT에 푹 빠져 있는 모습까지도 그는 여전히 나와 함께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오늘도 말한다.
“오늘 더 사랑해. 당신이 있어서, 나는 참 행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