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꿈이 세계일주야^^
뉴질랜드 1년, 싱가포르 1년, 몰타 1년.
내 나이는 마흔하나. 외국에서 3년을 살았다. 20대에 경험한 뉴질랜드와 싱가포르 그리고 결혼해서 아이들과 함께 40대에 떠난 몰타.
누가 보면 역마살이 가득한 팔자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여행이 좋고 외국의 문화를 경험하는 게 좋다. 여행자로서 둘러보는 타국의 삶과 현지인처럼 그곳에서 생활할 때 겪는 경험치는 차원이 다르다. 멀리서 보면 다 드라마고 영화 같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곳도 내가 사는 곳과 다르지 않은 보통의 삶이고, 인생이다.
처음 뉴질랜드에 갔을 때 스물두 살이었다. 그때는 두려움이 없었다. 대학교를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았고 운이 좋아 뉴질랜드 워킹 홀리데이에 당첨되었다. 당시에는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인원이 1년에 700명이었고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통장잔고와 신청서를 넣으면 추첨해서 대상자를 선정했던 걸로 기억한다. 나와 함께 지원한 친한 언니는 떨어지고 나만 당첨되어서 나는 뉴질랜드로 언니는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도착하자마자 어학원을 3개월 다니고 무작정 일을 할 수 있는 농장이 있는 지역으로 갔다. 사과 농장에 가서 사과를 따기도 하고 와이너리에 가서 포도 줄기를 묶는 일도 했다. 몸을 쓰는 일이었지만 노동의 참맛을 알았고 일끝나고 숙소로 돌아와 마시는 맥주의 청량함도 알게 되었다. 당시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곳이 농장말고는 거의 없었다. 일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면 외국인들과 파티를 했고 주말이면 외국인 친구들과 근교로 여행을 가기도 했다.
뉴질랜드에 간 나의 목적은 영어 실력 향상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외국인 친구들과 대화를 하려고 노력했다. 네덜란드, 이스라엘, 이탈리아, 독일, 그리고 일본인까지 우리들은 참 많은 추억을 공유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인연이 이어졌는데 특히 일본인 친구는 딸 둘과 함께 한국으로 여행을 와서 우리 집에서 머물렀다. 그후 나도 일본으로 여행을 떠나 친구 집에 숙박하며 일본 현지 가정을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를 얻었다. 이 친구와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연이 닿아 서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사실 나의 전공은 일본어라 기본적인 회화는 하는 편인데 이 친구는 뉴질랜드에 영어를 배우러 왔다고 하면서 나에게 일어가 아닌 영어로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영어로 서로 연락하고 있다. 조만간 친구를 한국으로 또 초대하고 싶다. 20년이 지나도 그 시절의 나를 추억해주는 친구가 있다는 건 너무 멋진 인생의 한 페이지가 아닌가 한다.
한국으로 돌아와 복학하고 졸업할 때쯤 또 나에게 기회가 왔다. 싱가포르 공항에서 인턴을 뽑는다고 했다. 20대에는 욕심이 많아서 일본어와 관광경영학을 복수 전공했다. 어문학부와 경영학부는 필수 과목이 달라서 당시 수업 들으며 상당히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부지런히 노력했고 덕분에 관광경영학과의 외국인 교수님 조교로 뽑히기도 했다. 그 덕분에 싱가포르 공항 인턴에 무사히 합격했고 1년을 싱가포르에서 지낼 수 있었다.
공항에서 내가 하는 일은 우리가 흔히 아는 지상직업무였다. 체크인을 하고 짐을 부치고 그리고 고객이 비행기 탑승하기 전까지 안내를 도와주는 업무였다. 나는 항공사 소속이 아닌 공항 소속이라 다양한 항공사에서 체크인 업무를 할 수 있었다. 주로 대한항공에서 일했지만 일본어를 할 수 있어서 일본항공에서도 자주 일했다. 대한항공에서 일할 때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싱가포르는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다. 그날은 대한항공에서 일하는 날이었다. 보통 한국 여권을 받으면 한국말은 하는데 그날은 웬일인지 영어로 업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손님의 마지막 짐을 부치면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를 했더니 손님이 “아따 싱가포르 아가씨가 한국말 잘하네요.” 하며 떠났다. 나 한국 사람인데...
싱가포르에서 살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역시 여행이었다. 싱가포르에서도 저가항공사를 이용하면 왕복 5만 원 정도로 태국을 다녀올 수 있었고 가까이에 있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도 여러 번 갔다. 싼 비행기티켓에 저렴한 물가를 생각하면 동남아 여행을 안 갈 이유가 없었다. 당시 동남아에 대한 좋은 추억 덕분에 결혼 후 아이들과 함께 태국 치앙마이 한 달 살기도 자신 있게 떠날 수 있었다. 아이들과 타국에서 산다는 것은 도전이었지만 두렵지 않았다.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치앙마이에서 아이들은 영어를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요가 스쿨에 가서 재미있게 놀았다. 호주 출신 파일럿에게 2:1 수영 레슨도 받고 손발이 퉁퉁 불 때까지 지겹도록 물놀이를 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치앙마이에 다시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를 정도인 걸 보면 분명 아이들에게도 좋은 추억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갑자기 2021년 8월 몰타로 1년 살기를 떠나자고 했을 때도 아이들은 치앙마이 한 달 살기를 먼저 떠올렸다. 나 또한 그때도 잘 지냈는데 이번에도 못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이들과 나는 자연스럽게 역마살에 익숙해졌다. 외국에서 사는 고단함이야 일일이 말하기도 어렵지만 가지 않았으면, 하지 않았으면 알 수 없는 엄청난 경험을 하고 돌아왔다. 아이 둘과 떠난 몰타 살기는 혼자 떠났던 뉴질랜드, 싱가포르와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그만큼 성숙한 엄마가 되었고 아이들도 나도 몰타에서 인생을 배웠다.
첫째 아이가 하는 글쓰기 수업이 있는데 주제가 ‘꿈’이었다. 아이가 한 장 빼곡히 적은 노트를 나에게 가져다주며 읽어보라고 했다.
저는 이루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제 꿈은 세계 일주를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다른 나라의 문화를 경험하고 다양한 음식을 맛보고 싶어서입니다. 최근에 몰타에서 1년 살기를 하면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사이프러스, 스위스 등 많은 나라를 여행했는데 그중에서도 스위스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저는 축구를 좋아하니 브라질에도 가보고 싶고 삼촌이 사는 미국에도 가보고 싶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나라에 관해 공부하고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고 싶은 나라에 직접 가면 보람도 있고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여행을 통해, 경험을 통해 세계여행이라는 꿈을 꾸게 된 아이. 너에게 역마살을 엄마는 선물로 준것같구나... 그래도 좋아. 엄마는 다시 20대로 돌아간다 해도 또 배낭을 메고 세상을 경험했을거야. 아들아 너의 꿈을 꼭 이루길 바라. 여행동반자가 필요하면 엄마한테 언제든 요청해. 난 항상 대기 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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