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입맛도 변하게 하지만 나의 추억도 흐리게 만든다
라면보다 국수가 좋아지는 나이가 되었다
어렸을 때 라면이 먹고 싶다고 말하면 엄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는 라면 안 좋아하셔.”
횟수로 따지면 다섯 번 중 한 번만 라면을 먹었던 것 같다. 당시는 국수만 찾는 아빠가 이해되지 않았다. 빨간 국물 속에 꼬불꼬불 탱탱한 면발에 노른자가 알맞게 익은 맛있는 라면 대신 밍밍한 멸치 육수에 간장 한 스푼뿐인 그 국수가 비교할 대상이긴 한 건가 싶었다. 한여름이 되면 더 자주 먹었던 국수가 미울 정도였다.
그러다 내 나이가 어릴 적 국수만 찾던 아빠의 나이가 되었다.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어 보니 라면이 몸에 좋은 음식이 아니라는 생각에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아이들에게 끓여주고 있다. 그마저도 아이들이 라면 먹고 싶다고 말하지 않으면 모른 척 슬쩍 넘어가기도 한다. 가끔은 아이들과 함께 먹는 라면이 맛있지만, 이상하게도 라면을 먹을 때면 늘 국수 생각이 났다. 그 시절 아빠가 찾던 국수였다.
여름에 친정에 가면 엄마는 어김없이 시원한 국수를 끓여주신다. 멸치와 다시마로 육수를 낸 뒤 얼음을 동동 띄워 시원하게 만든다. 익은 김치는 총총 썰어 고소한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어 무친다. 그리고 간장소스를 만든다. 간장소스에는 진간장과 다진 파, 깨소금, 고춧가루 그리고 참기름이 들어간다. 비주얼은 역시나 어릴 때 보던 그 비주얼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간장 소스를 국수에 한 스푼 넣어 휘리릭 저으면 말갛던 국물이 보리차 색으로 변한다. 육수를 떠서 한 입 넣으면 ‘그래 이 맛이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마 아빠도 이 맛에 국수를 찾으셨던 게 아닐까?라고 혼자 추측해 본다.
흔히 나이가 들면 입맛이 변한다고 한다. 전에 안 먹던 음식을 먹기도 하고 좋아하던 음식이 싫어지기도 한다. 과자를 좋아하던 내가 이제는 아이들이 과자 먹는 모습만 봐도 속이 더부룩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릴 때는 추어탕을 입에도 대지 않던 내가 몸이 허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나도 모르게 추어탕 맛집을 검색하고 있으니 말이다. 세월은 입맛도 변하게 하지만 나의 추억도 흐리게 만든다. 어린 시절 여름마다 냇가에 가서 물놀이하던 그날의 기억도 점점 가물가물해진다. 참으로 행복했던 순간이었는데 누구와 갔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차츰 흐려지는 과거의 추억이 그저 아쉽기만 하다.
라면보다 국수가 좋아지는 나이가 되고 보니 엄마의 삶도 누군가의 아내로서의 삶도 좋지만, 그저 엄마 아빠 딸로 살았던 지난날의 내가 너무 그립다. 어느새 노인이 되어버린 흰머리 수북해진 엄마 아빠 말고 과거의 젊었던 우리 엄마 아빠의 모습이 더 생각나는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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