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lar de Uyuni, Bolivia
'아, 떡볶이 먹고 싶다.'
나도 한국 사람이 맞긴 맞나 보다. 지구 반대편 남미의 이방인으로 지낸지 1개월 남짓. 딱히 한식이 떠오른다기보단 맛있는 현지 음식을 발굴해 내는 즐거움에 빠져있다가도, 이곳에서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고추장의 텁텁한 매운맛이 땡기는 걸 보니 말이다.
20년째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리 동네 분식집의 매콤 달콤한 떡볶이, 흰쌀밥에 쓱쓱 비벼 먹는 돼지고기 짜글이 김치찌개, 비 오는 날 광장시장에서 먹는 도톰한 녹두전과 주전자 막걸리, 차르르 참기름 윤기가 싹 도는 신선한 육회, 지글지글 숯불에 구워 먹는 오도독한 꼼장어, 한 쌈 크게 싼 마늘 족발에 쟁반국수, 밥 한 공기 말아서 후루룩 뚝딱 먹는 순대 국밥….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맛깔난 음식들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하며 넘어간다. 누군가 '지금 제일 먹고 싶은 음식이 뭐야?'하고 물어본다면 하루 종일 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 갑자기 한식이 너무나 그립다. 떡볶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었다.
"그거 알아요? 우유니에 김치볶음밥 파는 음식점 있는 거!"
나와는 정반대의 루트로 여행 중인, 우리가 만난 쿠스코가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라고 했던 여행자는 늦은 밤 시작된 수다 타임에 지치지 않는 에너지로 그간 쌓아온 데이터를 대방출 중이었다. 그가 쏘아 올린 김치볶음밥에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이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한국인들의 한식 앓이 시간. "전 한국 가면 바로 곱창전골에 소주 한잔 걸칠 거예요.", "저는 치킨이요. 후라이드 반 양념 반에다가 생맥주 한 잔. 캬!", "저는 떡볶이가 너무 먹고 싶어요. 찰순대까지 꼭 세트로 먹어줘야 되는 거 아시죠?"
서로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선전포고라도 하듯 먹고 싶은 음식을 하나씩 발표하며 앓는 소리까지 내고 있다. 아. 진짜 맛있겠다. 거기 알아요? 완전 맛집인데. 치킨은 A 브랜드가 최고죠. 예? B 브랜드가 짱이거든요.
어째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지만, 머지않아 머무르게 될 도시에서 한식 앓이를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다는 정보는 그대로 흘려보낼 수 없었다. 이야기의 주제가 또 다른 곳으로 튈세라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그래서 김치볶음밥 파는 거기가 어디라고요?"
이 식당에 다다르게 된 전말은 대충 이랬더랜다. 주인장 혼자서 운영하기 딱 적당한 평수의 깔끔한 식당이다. 여짓 지나온 곳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이곳만의 차별점이 있다면 또박또박한 한글로 적힌 <한국 음식> 메뉴판과 이곳을 지키는 파수꾼마냥 저 건너편 자리에서 나를 지켜보는 귀여운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는 것 정도. 이러나저러나 퍽 마음에 드는 곳이다.
“김치볶음밥, uno(하나), Please.“
한 문장에 한국어, 스페인어, 영어가 섞인 요상한 주문이라니.... 혹시나 싶은 마음에 두 번째 손가락 하나를 펼친 채였다. 이내 나의 주문을 해석한 듯 메뉴판을 가져간 웨이터이자 주방장이자 식당의 주인장인 그는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시간이 10분채 지나지 않아 빠르게 내어진 음식에 감탄을 숨길 수 없었다. 어릴 적 할아버지 댁에서나 봤을 법한 촌스러운(정겨운) 접시에 보기 좋게 올려진 둥그런 김치볶음밥, 그 위에 얹어진 반숙 이불이라니! '잠시 한국까지 순간이동해서 가져온 음식입니다.'라고 해도 믿을 법 했다.
"Gracias(감사합니다)." 짧은 인사말을 건네고 곧장 숟가락을 들었다. 반숙을 톡 하고 터트리니, 노른자가 시럽처럼 주르륵 흘러내린다. 내가 딱 좋아하는 반숙의 모양이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볶음밥을 한술 크게 떠먹고선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여행길 위에서 만나는 여행자들에게 이곳을 길이길이 전파해야겠구나!
이렇게 잠시나마 느껴본 한식의 맛에 한식 앓이가 억눌러질 줄 알았더니, 웬걸. 한번 맛보고 나니 입 터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전보다 더 다채로운 메뉴들이 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주인장님. 저도 순간이동 좀 알려주실래요? 아, 떡볶이 너무너무 너-무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