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 직원의 은밀한 수영복 취향
하늘하늘한 레이스 치마, 깜찍한 패턴이 들어간 원피스, 솜사탕이 떠오르는 파스텔톤 니트. 나열해 두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패션 아이템들이지만 차마 내가 입지 못하는 종류의 옷들이기도 하다. 요즘에야 '근무복 자율화 시대'라는 말이 돌고 있다해도, 실제로는 여전히 보수적인 집단이 많아 직장 내에서 입을 수 있는 옷차림에 보이지않는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옷장을 들여다보면 이렇게 개성이 없을 수 없다. 전날 입었던 바지에 다른 상의만 돌려 입어도 아무도 모를 만큼 아주 단조롭달까. 일주일 중 5일,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공간에서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에 드는 디자인, 입고 싶은 옷보다 의자에서 양반다리를 해도 걸리적거리지 않는 고무줄 슬랙스, 한번이라도 상사의 시선을 덜 받기위한 무난한 색상의 셔츠, 간식 몇 개 숨겨도 들키지 않을 주머니 달린 바지 같은 것들이 우선시되어버리고 만다.
언젠가 퇴근 후 만난 전 연인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자기야. 옷 좀 화사하게 입으면 안 돼? 맨날 무채색 옷, 지겹지도 않아?' 뭘 모르는 소리. 무채색 옷이야말로 직장인이 갖출 수 있는 최고의 보호색인 것을! 그래도 당시 나에겐 일도 사랑도 중요했기에, 그를 만나는 날이면 핑크빛 쉬폰 블라우스나 딱 붙는 핏의 화사한 꽃무늬 원피스를 몇 번 시도해 보았지만.... 일하는 내내 비치는 속옷 라인이 신경 쓰였으며, 일에 집중할 때면 자연스레 양반다리를 하는 버릇을 가진 나로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의 불편함에 금방 원래대로 돌아오고 말았다.
애인이 없는 지금이야 그렇다 치고, 집과 회사만을 오가는 단조로운 일상을 보낸 지는 더더욱 오래인지라 마지막 옷 쇼핑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수영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숨겨왔던 나의 욕망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로 수영인들의 전투복이자 취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수영복을 통해서였다. 물 밖 세상에서는 마치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을 흐릿하게 만드는 것이 추구미라면, 수영장에서만큼은 아방가르드한 패턴과 강렬한 색상의 수영복으로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고 싶다. 그렇다. 나는 수영장 한정 관심에 목마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수영인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물속에서는 색감이 쨍할수록, 그리고 패턴이 화려할수록 예쁘다는 것을. 수영복도 s/s 시즌, f/w 시즌별로 출시된다는 것도 근래에 처음 알았다. 너도나도 수영 열풍이 불었던 올해 여름에는 대형 백화점에서 수영복 팝업 스토어가 열린다는 소식도 심심치 않게 들려오기도 했다. 이쯤 되면 수영인들의 지갑은 여름 뿐만 아니라 사계절 내내 탈탈 털릴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런지.
강사님의 눈길을 피하고픈 햇병아리 수강생 시절에 입었던 검정색 5부 수영복은 수납장 구석에 고이 봉인된 지 오래. 이제는 나의 신체 부위 중 나름 자신 있는 등 라인을 한껏 드러낼 수 있는 X백부터 V백, 타이백 디자인이 아니라면 취급하지 않는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옷차림에 따라 자신감과 태도도 바뀐다는 결과도 있지 않은가? 느긋하게 유영하고 싶은 날에는 마치 인어공주의 비늘처럼 반짝이는 홀로그램 원단의 수영복을 입기도 하고, 열수(열정 수영) 의지가 활활 타오르는 날이라면 형형색색 화려한 패턴의 전투 수영복을 꺼내기도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수영복에 맞춰 어떤 프린팅의 수모를 써야 할지도 고민해야 하고, 수경 끈의 색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아야 완벽한 #SODT #오늘의수영패션 완성이라는 것을. 이쯤 되니 당장 내일 아침의 출근복은 뒷전이고, 퇴근 후 수영장에서 뭘 입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더 길다.
하루 중 길어봐야 고작 한 시간 입을 수영복이지만, 나는 열과 성을 다하여 고르고 또 고른다. 마치 수영장이 나를 위한 런웨이인 것처럼! 날이 갈수록 점점 좁아지고 있는 수납공간은... 잠시 모른 척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