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인생

물속에서만큼은 과감하게

by 서미

몇 번의 이직 끝에 정착한 지금의 직장은 막 좋지도, 그렇다고 썩 나쁘지도 않다. 현재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느냐?'고 묻는다면, 오히려 '만족한다' 쪽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30대에 접어들고 나서부터는 무엇이 들었는지 예상되지 않는 깜짝 선물 같은 것보다, 미리 골라 받는 선물처럼 정해진 것이 좋다. 이따금 일상을 떠나 익숙하지 않은 곳으로의 여행을 통한 일탈 정도가 지금의 나에게 딱 적당하다.


20대 초반에는 누가 들어도 바로 알만한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이 꿈이었다. 이력서를 빈틈없이 꽉꽉 채우기 위해 하루 24시간도 부족했다. 두 탕씩 뛰어가며 아르바이트비가 모이면 어학과 자격증 공부에 쏟아부었고, 대외 활동도 가리는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해댔다. 너도나도 다 한다는 그 비싼 자기소개서 컨설팅까지 받으며 취업에 열을 올렸던 바로 그 시기.


그러나 세상은 네 뜻대로 굴러가지않는다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듯, 가득 메운 나의 이력서를 보고서 한 기업의 면접관이 던진 질문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빨리 취업하고 싶은 이유라도 있어요? 뭐 이렇게 열심히 사셨대. 형편이 어려우신가....'

아마 그의 말뜻은 '취업에 목맨 사람처럼 보인다'였으리라. 틀린 말이라면 적당히 기분 나쁘다며 넘기면 됐을 텐데, 실제로도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을 원망했고, 빨리 취준생 신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속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 더 비수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그 질문 이후로 오갔던 대화들은 기억나질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내가 노력해온 삶이 이렇게 비쳐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저 이 공간을 1초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이제 나가셔도 된다는 말을 듣고서야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어떻게든 일으켜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몇 걸음 채 가지도 못하고 길거리 한복판에 쭈그리고 앉아 엉엉 울었던 스무 살 초반의 나. 며칠 동안 면접 예상 질문을 뽑아 밤잠까지 줄여가며 준비했던 내 모습이 너무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이런 경험 하나로 하루아침에 내 인생이 뒤바뀐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어김없이 이력서를 돌리고, 면접을 보고, 그 끝에는 마침내 나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으니까. 내가 씩씩하게 눈물을 닦아내고 일어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그날의 면접은 내게 좋은 인생 경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그런 일도 있었지'라며 웃어넘길 수 있는 해프닝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보다 지금이 더 버겁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그냥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정말 언제인가서부터 인생이 너무 길다고 느껴졌다. 적당한 직장, 적당한 취미, 적당한 의식주가 해결된 현 상황에서 열정을 쏟아낼 일이 더 이상 없을 것 같았다. 뭔가 잃어버린 것 같기는 한데, 도대체 무엇을 잃어버린 것인지 알 수 없어 답답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오늘은 강습이 있는 목요일. 나는 퇴근 후 어김없이 수영장으로 향했다. 가볍게 워밍업 다섯 바퀴를 시작으로, 우리는 강사님의 다음 지령이 내려지기만을 기다렸다.

"자, 오늘은 대시 영법을 해볼 거예요."

수강생 모두 갸우뚱했다. 기억을 되짚어보건대 아직까지 배워본 적 없는 영법이었다. 강사님은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여 설명했다.

"대시는 단거리를 전력으로 질주하는 영법을 말해요. 치타 아시죠? 육지에서는 치타가 엄청 빠르다고 하잖아요. 대시는 물속에서 가장 빠른 영법이라고 보시면 돼요."


어쩐지 듣기만 해도 숨이 차는 기분이다. 나는 아무래도 '전력'과 '가장 빠른'과는 거리가 먼 수강생이었기 때문이다. 적당히 느긋한 속도로는 25m 레인을 몇 바퀴고 돌 자신은 있었지만, '전력으로 빠르게'라는 조건이 앞에 붙는다면 고작 한 바퀴만으로도 기진맥진할 것이 뻔했다. 이런 내 마음을 강사님은 아는지 모르는지, 단호하게 수면을 내리치며 외쳤다. 출발!


첫 바퀴째. 어떻게든 팔과 다리를 재빠르게 휘저었지만, 이건 대시가 아니라 조금 빠른 자유형 같았다. 강사님은 다급하게 우리를 불러 모아 말했다. 자유형 할 때처럼 팔을 꺾지 마시고, 크게 돌리세요. 마치 풍차가 돌아가는 것처럼요!

두 바퀴째. 전보다는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가 빨라졌다고 하기에는 애매했다. 강사님은 조금씩 숨이 차오르는 우리를 한 번 더 불러 모아 말했다. 이번에는 무호흡으로 가보세요. 25m가 끝나는 지점까지요!

세 바퀴째. 확실히 호흡을 참고, 풍차처럼 팔을 돌리자 물을 가르는 감각이 선명하게 달랐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물속의 고요한 소란을 즐기려던 찰나, 나는 이미 레인 끝에 도착해있었다. 순식간이었다.


강사님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레인 줄에 몸을 맡긴 우리의 지친 기색을 드디어 눈치채셨는지, 더 이상 출발을 외치지 않았다. 대신 쭈그려 앉아 상냥하게 물으셨다.

"힘드시죠?"

"네."

"그래도 할 만 하죠?"

"...네."

"한 번 더 갈까요?"

"아니요!"


그날 이후로 강사님은 강습이 끝나기 직전, 반 인원을 두 레인에 나눠 세운 뒤 대시로 시합을 겨루게 한다(그러나 아무도 경쟁 심리를 가지진 않는다. 우리는 모두 퇴근 후 지친 수영인이기 때문이다.). 이미 강습만으로도 충분히 녹초가 된 상태지만, 나는 남몰래 이 시간만을 기다린다.


적당히 해서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속도의 벽을 뚫고 지나가는 것. 벅찬 숨을 참아내고, 물의 저항을 빠르게 밀어붙이는 이 순간만큼은 마치 사바나의 초원을 달리는 한 마리의 치타처럼 질주한다. 이러다 보면, 언젠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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