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 로맨스
24살의 한여름. 계절만큼이나 뜨거웠던 나의 첫 연애가 시작됐다. 주변 친구들에 비하면 다소 늦은 출발이었다. 늘 연애 상담만 하면 이성적으로 굴던 나에게 '넌 이래서 어떻게 연애할래?'라던가, '네가 연애하면 그런 소리 할 수 있나 보자'라는 말이 돌아올 정도로 연애라는 것에 냉소적이었으며, 그만큼 뭘 모르던 무지랭이였다. 그 말들을 증명이라도 해보이겠다는 듯 사랑 따위 없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날도 있었다.
그러나 지나친 확신은 오만으로 이어지는 법. 그토록 자신있게 내뱉었던 망언들을 주워 담고 싶을 만큼, 나는 첫 연애 상대였던 그에게 푹 빠져있었다. 친구들이 왜 사랑에 웃고 울고, 그렇게 야단을 피웠는지 내가 직접 겪고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얕고 작은 웅덩이에 불과했던 내 감정을, 더 깊고 넓은 바다처럼 만들어준 최고의 경험은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그와 나는 태어난 곳도, 전공도, 삶의 지향점도 모두 달랐지만, 영화를 좋아한다는 점만은 같았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은 영화 속에서도 수많은 장르가 존재한다는 것. 그는 추격전이 펼쳐지거나, 히어로들이 세상을 구하는 화려한 액션 영화를 좋아했다. 감성 로맨스를 좋아하는 나와는 정반대의 취향이었다. 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영화관에서 로맨스 영화를 본 적 없다고 했다.
나는 별안간 그 이유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어 이유를 말해주길 기대했으나, 그럴 기색이 보이지 않자 결국 못 참고 물었다. 딱히 이유가 있느냐고.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현실의 사랑은 영화처럼 아름답지 않다는 걸 알아서인지 영 몰입이 되질 않는다고. 차라리 현실감 없는 액션 영화 쪽이 더 좋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와 연애를 하고 있는 나로서는 조금 복잡한 기분이 들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다만 1년은 365일, 1일은 24시간이라는 시간의 법칙 따위는 깡그리 무시하고 그와 하루라도 더 빨리, 더 많은 시간을 쌓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보면, 어쩌면 그가 로맨스 영화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서.
집 데이트를 하던 어느 날, 우리는 고민에 빠졌다. 무슨 영화를 볼지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히어로 영화를 보자고 했지만, 못해도 30편이 넘는 시리즈물을 도저히 볼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로맨스지만 코미디이기도 하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나오는 판타지 로맨스 SF영화가 있다고. (사실 이런 장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썩 틀린말은 아니었다.) 다음에는 꼭 히어로 영화를 보자며 설득한 끝에 재생한 <어바웃 타임>은 다행히도 그의 취향에 맞는 듯 했다. 2시간의 러닝타임 내내, 그는 나보다 더 영화에 빠져있었다.
생각보다 재밌네? 그는 짧은 감상과 함께, 다음에는 영화관 가서 보자는 말만으로도 나를 기쁘게 만들었다. 그 말을 잊고 지낼 즈음, 아직 예고편으로만 소개된 로맨스 영화를 찾아와 다음 데이트 때 보러 가자는 그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다. 사랑이라는 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할 수 있게 만드는 요술 같았다.
그러나 그와 본 로맨스 영화가 한 손바닥을 다 접기도 전에 헤어졌다. 딱히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그는 그저 마음이 식은 것 같다고 말했다. 우울해하는 그를 달래려면 달콤한 팝콘과 액션 영화를 보러 가면 된다는 것은 알았지만, 식은 마음을 되돌릴 방법은 알 수 없었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벤치의 딱딱함이 불편했다. 왼편을 보니 그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음이 저렸다.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 사람은 나였다. 등 뒤로 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지나가던 빈 택시를 잡아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 마치 억지로 앉아서 본 한 편의 B급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사람이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떤 상태가 되는지 이때 처음 알았다. 무슨 음식을 먹어도 위장에서 받질 않아 게워내기 일쑤였고, 자려고 누우면 귀에서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맴돌아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울다 지쳐 잠드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그와 함께하던 시간을 이제는 혼자 보내야 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두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가장 먼저 운전면허 학원을 등록했으나, 일주일 만에 면허증을 따버리는 바람에 이별의 아픔을 극복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순간이었다. 목표로 했던 어학 점수도 한 달 만에 달성해 버렸다.
이런 나의 이별 차력 쇼쇼쇼를 곁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친구는 너 두 번 헤어지면 수능이라도 다시 칠 기세라며 조금 무서워했다. 어떻게든 그를 잊기 위해 바쁘게 살고는 있지만, 여전한 불면증과 소화불량에 힘들다고 말하는 내게 친구가 그랬다. 이번엔 운동을 해보는 건 어때? 너 옛날에 수영 잘했잖아.
중학교 2학년 수영부 활동을 마지막으로, 수영장에 발을 들인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또래들만 있었던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훨씬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모인 중급반에서 다시 수영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 반에는 유난히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아 보이는 회원이 많았는데, 폼만 보면 마치 드림팀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하필 젊은 여성은 반에 나 하나뿐이었다. 나는 물속으로 들어오자마자 줄의 맨 뒷자리에 섰다. 마지막으로 수영한 뒤 10년 가까이 시간이 흐른지라, 분명 자세도 엉망이고 폐활량도 많이 떨어졌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뒷자리 터줏대감인 어르신 회원들이 젊은 처자가 앞에 서야지, 우리는 느려서 답답할 거라며 등을 떠미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드림팀 뒤에 설 수 밖에 없었다. 아직 강습이 시작되기도 전인데, 벌써 긴장이 됐다. 그들의 속도를 내가 따라갈 수 있을지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영에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 앞 사람이 출발 후 5m 지점의 깃발을 통과하는 것을 확인한 뒤, 그다음 사람이 출발하는 것. 서로 부딪히지 않기 위해 유지하는 안전거리이자,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페이스를 조절하기 위해서는 지켜야하는 간격이다. 조금이라도 간격이 벌어지거나, 숨이 차서 멈추는 순간 앞뒷사람 모두의 리듬이 깨질 수 있기 때문에 지켜야만 하는 일종의 매너인 셈이다.
나는 혹여 거리가 벌어질까 걱정하는 마음이 앞서, 내 앞사람이 출발함과 동시에 함께 출발 해버리거나, 급한 마음에 빠르게 수영하다보면 간격을 어기고 앞사람의 발을 터치하기도 했다. 앞에 있던 회원분은 처음에는 내색하지 않았으나, 두 번째, 세 번째가 되니 조용히 읊조렸다. ‘발을 자꾸 치시네....’
나는 너무 죄송한 나머지 빠르게 사과하고 줄의 맨 뒤로 후다닥 자리를 옮겼다.
그 뒤로 5m 깃발을 넘었는지 타이밍을 보고, 앞사람의 발을 치지 않도록 거리를 조정하고, 호흡과 자세까지 신경쓰려니 한시간의 강습시간 내내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집에서 체육관까지 약 1km의 거리도 걸어서 오갔기 때문에, 집에 도착하면 완전히 파김치가 되었다. 불면증의 'ㅂ'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곯아떨어졌다.
체중은 그대로였으나 눈으로 보이는 신체의 탄탄함이 확연히 달라졌다. 불편해서 손이 잘 안가던 딱 맞는 바지도 헐렁해졌고, 입맛이 돌아 뭘 먹어도 맛있게 느껴졌으며, 양도 늘었다.
일전의 그 친구는 만나자마자 '너 혈색 좋아졌다! 연애 해?'라며 물었지만,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 것도, 전 남자친구가 돌아온 것도 아니었다. 단지 수영을 다시 시작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이 작은 변화들이, 어쩐지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할 것만 같았다. 나는 친구와 헤어지자마자 수영 가방을 들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훨씬 건강해진 몸과 마음으로, 다음 연인과 함께 찍을 로맨스 영화를 준비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