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수영과 엉덩이의 상관관계

엉덩이 기억상실증을 아시나요?

by 서미

4년 전 가을. 어느덧 20년 가까이 함께해온 절친들과 1박 2일로 가평 여행을 떠난 날이었다. 짧은 치마와 고데기로 한껏 멋을 낸 머리보다, 고무줄 바지에 아무렇게나 틀어 올린 머리의 모습이 더 익숙한 우리는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뱀이 허물 벗듯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옛날부터 다함께 찜질방과 목욕탕을 자주 다녔던 터라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알몸을 보든 말든 옷과 속옷을 훌렁훌렁 벗는 중이었는데,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티격태격하기 바빴다.

"야 너 가슴이 좀 커진 것 같다. 혼자 좋은 거 먹냐?"

"야이씨, 그냥 살쪄서 그런 거야."

"야너두? 야나도. 근데 나는 왜 배만 나오지?"

"너 그거 다 술 살이야. 술이나 줄이고 말해."

"아, 진짜 운동 해야되는데."

"그니까... 아, 헬스나 시작할까."


입으로는 당장 내일부터라도 운동할 것처럼 말하지만 실행할 의지는 전혀 없는 비운동인들의 대화 틈으로 우리 중 유일한 운동인인 미라가 불쑥 끼어들었다.

"나 얼마 전부터 필라테스하잖아. 근육 좀 생긴 것 같지 않냐?"

"에이,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믿지 않는 우리에게 불쑥 팔을 내밀어 만져보라고 하더니, 진짜로 가느다란 팔뚝에서 조그만 알통이 만져지는 것 같았다. 오... 오오... 감탄하는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미라는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자세를 알려주겠다며 여러 가지 동작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간단한 자세인데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우리의 몸을 한두 번 잡아주던 미라는 할 만큼 했다는 듯 소파에 털썩 앉으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얘들아. 그거 알아? 사람이 운동도 안 하고 근육도 빠지면... 엉덩이 기억 상실증에 걸린대."

우리는 귀를 의심했다.

"엉덩이 기억 상실증? 그런 게 어딨냐."

"진짜야. 너네 다 일어나봐."

우리는 미라의 지휘에 따라 일렬로 나란히 섰다. 그러더니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엉덩이를 덥석 잡는 것이 아닌가! 친구에게 알몸은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어도, 엉덩이를 잡히다니... 왠지 수치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자. 엉덩이에 힘 빡 줘 봐!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해했다. 엉덩이에 어떻게 힘을 주라는 거지? 일단 시키는대로 흡! 하고 온 힘을 주었으나, 엉덩이는 여전히 말랑말랑했다.

"봤지? 이게 바로 엉덩이 기억상실증이야. 너넨... 이제 큰일 난 거야..."

안타깝다는 듯 말하는 미라에게 우리는 제대로 긁히고 말았다. 야, 나 힘 안 줬던 거거든. 지금 다시 만져보라며 하나의 원으로 서서 서로의 엉덩이를 탐하고 있는 꼴이 웃겼다. 이날의 여행을 떠올리면 머릿속에 남는 건 온통 엉덩이뿐이었다.


집으로 가는 퇴근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DJ의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어쩐지 며칠 전의 가평 여행이 떠오르는 듯했다. 마침 그녀도 엉덩이 기억상실증에 대해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앉아 있는 시간이 많거나 운동량이 부족하거나 하면 엉덩이 근육이 힘을 내는 법을 잊어버리는데요, 그 상태를 '엉덩이 기억상실증'이라고 부른대요. 몸의 근육이 제 역할을 잘하려면 자꾸 움직이고, 자주 사용해 줘야 한다는 거잖아요. 아마 우리 마음에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겁니다. 내 안에서 스스로 힘을 내는 법을 잊지 않으려면 이리저리 부딪히면서, 꼭 필요한 감정 근육을 키우는 게 중요할 거 같거든요. (강한나의 볼륨을 높여요, 21.10.16일의 오프닝 중)


그리고 그다음 날도 출근하자마자 인터넷을 켰더니, 겨울이 되면 활동량이 줄어드는 현대인들이 많아 엉덩이 기억상실증의 위험이 증가하고 있다는 뉴스 기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묘하게 한 단어가 계속해서 나를 맴도는 느낌이었다. 나는 손을 의자 뒤로 슬쩍 넣어 엉덩이를 만져봤다. 윤곽 없이 흐물거리는 게 꼭... 꼭 유튜브에서 본 슬라임 같았다. 갑자기 내 마음속에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요즘 세상에는 배울 수 있는 운동이 정말 많다. 헬스부터 요가, 테니스, 골프, 복싱까지 마치 취향대로 골라 먹는 메뉴처럼 다양하다. 하지만 당시의 내게 딱히 흥미를 끄는 운동은 없었다. 몇 주간 맛보기로 다녀본 헬스에는 영 재미를 붙일 수 없었고, 요가는 유연성 검사에서 늘 마이너스 수치가 나오는 나에게는 도전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떠오르는 건, 늘 그렇듯 수영이었다.


사실 수영만은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고 싶었다. 운동을 몇 년간 쉬던 사이 탄력 있던 허벅지 근육은 바람 빠진 풍선이 되었고, 무엇보다 이제는 예전만큼 수영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잘하던 것을 잘 못 하게 되었을 때, 볼품없어진 나를 마주해야 한다는 두려움이랄까. 게다가 그때보다 적어도 7-8kg은 불어난 체중과, 나이의 앞자리가 2에서 3으로 바뀌면서 꺾여버린 체력도 무시할 수 없다.

다행히 오피스텔 근처에 생긴 지 얼마 안 된 체육관이 있어 곧장 등록부터 했다. 일단 실력은 둘째치고, 모든 영법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상급반으로 등록해 달라는 공지가 있어 이번에는 상급반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첫 강습이 시작되자마자 어색할 줄 알았던 분위기는 의외로 화기애애했다. 수영장이 많지 않던 이 지역에 새로운 시설이 생기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체육관에서 넘어온 회원들이 제법 있었다. 이미 서로 친해 보이는 분위기 속에서 나만 붕 뜬 기분이었다.

그러다 늘 말없이 조용하게 다니던 내가 신경 쓰였는지, 우리 반 왕언니인 영란 언니는 내 얼굴을 볼 때마다 한마디씩 건네주었다. '밥은 먹고 왔니?', '오늘도 잘하자' 같은 형식적인 인사일 뿐이었지만, 그 말들 속에는 묘한 따뜻함이 느껴졌다. 나는 그 다정함이 좋았다.


우리 체육관의 수영장에는 기초, 초급, 중급, 상급, 마스터 총 다섯 개의 반이 있다. 각 반당 최소 인원 17명 이상이 모여야만 반이 개설되는 시스템이었다. 개관 후 약 두 달 동안 한 번도 인원을 채우지 못한 마스터 반은 이번에도 13명밖에 모이지 않아, 다음 달부터는 상급반과 합쳐진다는 새로운 소식이 있었다. 당시에는 별생각이 없었으나 강습이 시작되자마자 곧장 도망치고 싶었다. 정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운동량이었다.

준비 운동이 끝나자마자 워밍업으로 자유형 10바퀴는 기본이었으며, 오리발을 끼는 날에는 강사님이 어디선가 인터벌 타이머까지 들고 와 1분 사이클로 뺑뺑이를 돌게 했다. 다들 이 미친 운동량이 괜찮은 건가?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 새빨개진 얼굴과 새파래진 입술로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이 시간이 버거운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안도했다.


이후 강습에서도 무리해서 앞사람을 따라가다가 몸에 힘이 너무 들어가는 바람에 종아리에 쥐가 나거나, 턱끝까지 차오른 호흡을 몰아쉬느라 갈비뼈까지 욱신거렸다. 이건 더 이상 건강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몸을 혹사 시키는 하드 트레이닝이었다. 월말이 다가오자, 수강생들은 샤워실에 모여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다음 달에 어느 반으로 등록하실 거예요? 나는 스트레스받아서 더이상 이 반에 못 있겠어. 수영 오기 전날 밤만 되면 걱정부터 된다니까."

"그래도 이렇게 운동을 해야 체력이 늘지 않겠어요? 나는 지금 우리반 선생님 너무 좋은데."

떠나려는 사람과 남으려는 사람. 딱 반반이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한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강습이 시작되자마자 강사님이 말했다. 앞으로 우리 반은 1,800m의 운동량을 소화할 수 있도록, 훈련 위주의 수업으로 진행될 거라고. 그 말은 내 귀에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지금껏 기록한 거리 중 최고 기록은 1,450m였고, 그마저도 버티기 벅찼던 날이었음을 떠올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눈에 띄게 망연한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언제나처럼 강습은 시작되었고, 나는 줄의 맨 끝에서 몰래 한두 바퀴씩 쉬어가며 수영했다. 나보다 연장자인 분들도, 수영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분들도 나를 제치고 앞서갔다. 자꾸만 뒤처지는 나 자신에게 화가났다. '내가 몇 년만 더 어렸더라면', '운동을 꾸준히 하기만 했더라면'이라는 핑계는 통하지 않았다.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그저 나의 한계임을. 결국 다음 달부터는 중급반으로 내려가야겠다는 씁쓸한 결심을 해야만 했다.


한번 결심하고 나니 안일한 마음이 나를 해이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중급반 갈 건데, 뭐. 나는 어차피 못 할 건데, 뭐. 억지로라도 따라가던 내가 포기하고 쉬는 모습이 이제는 그럭저럭 받아들여졌다. 왠일로 몇 분 지각한 영란 언니가 열심히 헤엄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덩그러니 남겨진 내게 물었다.

"너 왜 안 하고 혼자 있어?"

"언니, 저 너무 힘들어요."

"아니야. 네가 괜히 힘들다고 생각해서 그래."

언니의 단호한 말에 뭘 아느냐고 울컥 분이 치밀어 오를 것 같았지만, 그녀 나름의 격려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니는 물속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뒤에서 천천히 따라갈테니까 네 속도대로 가봐. 다른 사람들 신경쓰지말고."


나는 조금 더 쉬고 싶었으나 내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리는 언니의 모습에 결국 한숨을 쉬며 물안경을 썼다. 뒤에서 따라오는 언니가 내 속도에 답답함을 느낄까 걱정되었지만,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내 페이스대로 호흡을 조절하며 레인을 몇 바퀴고 돌았다.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수영장을 울릴 때까지.

그리고 놀랍게도, 그날 나는 신기록을 갱신했다. 1,800m에는 못 미치는 거리인 1,675m였지만, 중간에 두 바퀴를 쉰 걸 생각하면 나름 선방인 셈이었다. 샤워실에서 뜨거운 물줄기를 맞고 있는 내 옆으로 언니가 다가왔다.

"어때. 힘들어?"

신기하게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그냥 배만 좀 고팠을 뿐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영란 언니는 내가 기특하다는 듯 씨익 웃으며 말했다.

"거봐. 할 수 있지?"


그날 이후 나는 반이 바뀌는 일 없이 2년간 마스터 반에 체류 중이며, 이제는 1,800m의 거리가...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기꺼이 해낼 수 있는 수영인이 되었다. 아, 탱글해진 엉덩이는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