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둘, 셋 뛰어!
음악을 듣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고 한다. 하나는 플레이 리스트를 반복 재생하는 사람. 또 하나는 한 곡에 꽂히면 질릴 때까지 그 노래만 듣는 사람.
나는 전적으로 후자에 가깝다. 한 번 꽂힌 노래는 아침에 눈을 떠 출근을 준비할 때에도, 침대에 누워 잠들기 직전까지도 몇날 며칠을 들어야만 직성이 풀린다.
이런 변태 같은 기질에 반골기질(일명 '홍대병'이라고도 한다.)까지 있는 나는, 한창 또래 친구들이 동방신기 오빠들에게 열광하던 시절에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우리 오빠 짱 멋있지!'라며 코팅까지 해서 소중히 들고 다니던, 샤방한 오빠들의 사진을 보여줘도 내 심장은 미동조차 하지않았다. '하루만 니방의 침대가 되고싶어~'라는 가사는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듣는 순간 귀가 간지러워지는 기분이다.
'그럼 너는 얼마나 대단한 음악 취향을 가졌길래?'라며 눈을 치켜뜨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당시 나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 달달한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클래지콰이, 러브홀릭, 럼블피쉬 같은 인디 가수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새로운 앨범이 나오는 날이면 전곡을 MP3의 맨 첫 번째로 배치하는 것은 물론, 배터리가 다 닳아 강제 종료될 때까지 내내 반복 재생했다. 그러면 안되는 걸 알면서도 긴 머리카락 속에 이어폰 줄을 교묘하게 숨긴 채, 수업 내내 선생님의 목소리대신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더란다.
세월이 흘러 학창시절 나의 보물 1호였던 MP3는 구닥다리 애물단지가 되었고, 손바닥만 한 작은 화면에서 동영상까지 재생할 수 있는 MP4 세대를 거쳐, 이젠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시대까지 도래하고야 말았다. 국내 최초 스마트폰의 출시가 2009년이었다는 것을 떠올리면, 기술의 발전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달까.
초등학생 시절, 아직도 기억나는 추억 중 하나는 과학의 날을 맞아 미래 도시를 그릴때면 나는 늘 수중도시를 주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깊은 바다 속, 커다란 투명 돔이 덮인 그곳에서는 물고기와 사람이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네모난 스케치북에 열심히 그려 넣었다.
아쉽게도 수중도시는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이지만, 적어도 물속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까지는 오게 되었다. 바로 고막을 거치지않고 두개골의 뼈를 통해 진동으로 소리를 전달하는, 골전도 기술을 이용한 이어폰이 등장한 덕분이었다.
첫 출시일부터 수영인들의 눈을 번뜩이게 만든 이 이어폰은 수영인들의 잇템이 되리라 의심치 않았건만, 높은 등급의 방수 기능과 기술력 때문인지 20만원대라는 예상보다 비싼 가격이 나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얼마나 고민이 됐냐면, 이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유유자적하게 배영하는 내 모습이 꿈에 나올 정도였다.
어차피 여름은 매년 돌아오고, 평생 수영을 즐길거라고 생각하면 그 값은 충분히 뽕을 뽑고도 남을 것 같았다. 고민은 배송을 늦출 뿐이라고 했던가. 두달 가까이 이어진 고민을 접고, 나는 결제 버튼을 누르며 결정했다. 올여름 휴가는 수영장으로 떠나기로!
실제로도 운동을 할때 비트가 빠르거나 신나는 음악을 들으면 도파민과 엔돌핀 같은 호르몬이 활성화되어 지구력이 15%나 상승한다고 한다. 기분탓이 아니라, 음악 하나만으로도 맨몸에 부스터 장착, 운동량 경험치 2배 이벤트 시작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구매 직전 찾아본 수친(수영 친구)들의 실제 사용 후기 중에는 1,000M를 돌던 사람이 2,000M를 돌게 됐다는 글을 본 이후로, 내 마음은 더욱 기대감으로 부풀기 시작했다.
드디어 이어폰의 첫 개시날. 기대에 부풀어 언박싱을 했지만, 어쩐지 애매한 기분이 들었다. 줄 이어폰 시절보다도 음질이 더 흐릿했고, 뭐랄까. 옆집에서 크게 틀어놓은 음악을 어쩌다 함께 듣는 기분이랄까. 멀리서 둥둥 울리는 소리에 혹시 불량품이 온것 아닌가 싶은 걱정이 스쳤다. 기대 반, 의심 반이 섞인 마음으로 물속에 몸을 담그는 순간-
물속에서 콘서트를 개최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선명해진 음악 소리가 내 심박수를 높였다. 수영장 레인이 오직 나만을 위한 트랙이 된 기분이 들 정도로! 물을 가르는 손발이 이전보다 더 빠르게, 더 힘있게 움직였다. 그동안 겁이나서 머뭇거렸던 플립턴도 단숨에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샘솟았다. 물론 용기와 별개로 물만 왕창 먹었지만 말이다.
이 이어폰 하나로 원래 돌던 운동량보다 두 배를 돌게 되는 마법 같은 일은 없었다. 다만 숨이 점점 차올라 쉬고 싶은 마음이 들기 직전, 버저비터를 노리는 농구선수처럼 마지막 숨까지 몰아붙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이 노래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앞으로 한 바퀴만 더! 마치 나를 위한 응원가 처럼말이다.
이제는 자유수영의 필수 아이템이 되어버린 이어폰은 여태 샀던 수영 장비중 가장 비싼 소비였지만, 지금은 없어서는 안될 나의 소중한 수영 동반자가 되었다.
어쩌다 깜빡하고 이어폰을 집에 두고 온 날이면 어쩐지 수영할 의욕마저 사라진다. 역시 운동은 장비빨이라더니. 그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콘서트를 왜 가나? 물속이 나만의 콘서트장이자 흠뻑쇼인 것을! (물론 기회가 있다면 꼭 가고싶다.) 비록 이번 생에는 블랙핑크의 제니는 못되더라도, 수영장의 쟤니정도는 되어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수영이 너무너무 하기 싫은 날도 있기 마련. 그럴 땐 제일 신나는 노래들로 플레이 리스트를 꽉 채우고, 볼륨을 한껏 높인다. 그리고 들려오는 노래속 가사가, 결국 나를 물속으로 뛰어들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든다.
숨참고 하나, 둘, 셋 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