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비빔밥이요
식사는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라고 물으면 승무원이 많이 당황 할거 같아 조심스럽게 말해 드렸다.
전 비빔밥이요.
1999년쯤 일까, 내가 첫 비행기를 타고 뉴질랜드로 향할 때도 승무원은 같은 걸 물었다. "식사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대한항공의 클래식한 멘트라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굳이 찾아보면 있겠지만 내 글은 대한항공의 식사메뉴의 변천사 정보통이 아니니 그 부분은 깊게 파고들지 않고 싶다. 이민자의 생활과 비행기의 식사는 꼭 거쳐가야 할 스텝 같은 거지만 길게 꺼낼 이야긴 아니니 우선 덮는다.
어쨌든, 난 이번 인천-밴쿠버 비행에서 첫 식사로 비빔밥을 먹었다. 여전히 정갈하게 버섯, 시금치, 당근, 양파, 고기, 호박 정도로 적당하게 익힌 적당하게 썰린 야채들이 색색별로 둥그렇게 올라가 있는 하얀 접시에 담겨 있었다. 내 식사가 테이블로 올려지면 승무원은 뜨거운 물이 부어진 미역국을 건네어 한마디 던진다.
"뜨겁습니다"
국 뚜껑이 반쯤 들어 올려 저 덜렁거리며 연기를 내뿜는다. 눈으로 봐도 알겠다. 국은 뜨겁다. '그'의 뜨거운 경고와 함께 난 조심스레 투명 플라스틱을 열어 그 밑에 깔았다. 아, 여기서 '그'는 남성 승무원이다. 이번 비행에서 하루 4시간씩 운동만 하실것 같은 남성분 스튜어디스를 첨 보았다. 여성분들도 완벽한 헤어와 메이컵을 자랑하는 대한항공이지만 그분처럼 완벽한 남성 헤어스타일 또한 처음 봤다. 머리를 젤과 무스로 빗어 넘겼지만 적당한 볼롬으로 잘 뒤로 제쳐 올리신 남자 승무원이 셨다. 인상 깊었다. 매력만점인 그분이 넘겨주신 미역국을 염려해 두며 그 옆 나물뚜껑을 열어놔 준비하고, 맨 왼쪽에 있는 햇반도 열어 밥 1/2만 나물 위에 툭 올려버렸다. 한 공긴 왠지 움직임 없는 비행에선 내 속이 부담스러워 할거 같아 그랬다. 비빔밥에 하이라이트,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그릇과 그릇사이를 흘겨보다 보니 찾았다. 한쌍이 보인다. 참기름과 볶음 고추장.
고추장 하니 예전에 비행기만 타면 비빔밥 시킨 승객들이 밥 한술 뜨기도 전에 볶음고추장 튜브를 한두 개씩 더 달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어느 순간부턴 승무원들이 죄송하다며 더 없다고 거절을 했고 나중엔 SKYSHOP 매거진에서 판매하는 걸 보고 난 피식 웃었던 생각이 난다. 그때는 중고등학생 때 한국-뉴질랜드 오갈 때라 내 앞뒤옆에서 고추장인기를 몰래 듣기만 했었다. 잘 모르겠다. 왜 이 자그마한 튜브형 볶음 고추장이 내 앞에 있을 때마다 속으로 나에게 묻는 건지,
충분.. 할까..?
오늘도 같은 마음의 작은 질문에 답해주는 사람은 없다. 매번 충분하다는 걸 알면서 더 불안한 볶음 고추장. 잠시 불안함을 잊고 난 참기름을 뜯어 먼저 밥 위에 두르고, 볶음 고추장은 튜브 뚜껑 열어 붙어있는 은색껍질을 뜯는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고추장을 힘껏, 짜보았다. 5초도 안거린 거 같다. 사실 밥도 1/2만 넣은 상태라 한통 다 넣으면 짤 수도 있다는 생각은 창문밖으로 던진 지 오래다. 단 한 가지 목표. 난 이 고추장을 단 한 덩어리도 남길 수 없다는 못된 옛날 버릇이 남은 거다.
식사는 역시 꿀맛이었다. 늘 그렇듯이 비빔밥이 옳다.
6시간 정도가 지나니 밥 생각도 없었는데, 승무원들이 식사캐빈을 들고 좁은 복도를 지나가니 왠지 반스푼이라도 먹어야 될 거 같아 등받이를 올렸다. 그런데 방송이 나온다. 오늘의 3가지 메뉴를 읊어주고 있는 게 아닌가. 오, 신식. 나머지 두 가지 식사는 관심이 없었고 난 이번엔 죽을 택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짐 찾고 또 벤타고 1시간 집으로 가 대충 짐 풀고 씻고 애들 밥 챙겨주고 그러려면 내가 내 몸에 에너지를 채워 넣어 놔야 할거 같은 저축식사 같은 거였다. 죽은 적당한 간에 아주 술술 넘어가 한통을 다 먹을 거 같아 반쯤 먹었을 때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사과한쪽이 굉장히 달고 맛있었다.
그렇게 2번의 식사를 하고 나니 다시 내 나라 아닌 내 나라에 도착해 컨베이어벨트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가방 50여 개를 넉 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카트 두 개를 가져다 놓고 한눈판 사이 누군가 내 카트를 낚아채가도 그 순간 그를 따라가 내 카드여 내놔라고 싸움을 붙이지 않을 수 있게 '인내와 자비'를 쥐어짜게 된 시너지는 아마 죽 반그릇 덕분이라 여긴다.
밴쿠버이작가.
(지니모어에서 *밴쿠버이작가로 활동하려 합니다. 앞으로도 좋아요 댓글 계속 응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