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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사 Oct 22. 2023

처음 만난 여름 방학

처음 만난 여름 방학 (5)

  심해진 폭력은 결국 눈에 보이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곳만 맞았는데, 마구잡이로 맞게 되면서 얼굴이나 팔 등 눈에 보이는 곳에도 상처가 생겼다. 그러나 지금까지 애써 숨기고 산 것이 허무할 만큼 누구 하나 아는 척을 하거나 물어보지 않았다. 다들 제 살길이 바빴다. 특히 팔에 생긴 깊은 상처는 흉하게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 나중에 커플 문신할래?”


  한별이 윤슬의 팔에 난 흉터를 보며 말했다. 그는 휴대폰으로 여러 문신 도안을 보여주며 신나게 물어왔다.


  “오! 그러자! 레터링 할까, 아니다 그림으로 할까?”


  한별의 말에 윤슬은 눈이 초롱초롱해지며 문신 도안과 연예인 문신 사진을 여러 장 찾아보았다. 그녀의 기분도 덩달아 설레었다.


  한별은 늘 밝았다. 어둡고 쓸쓸한 날에도 괴로워하면서도, 숨어있는 행복을 찾아낼 줄 아는 아이였다. 내일을 기대할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한별은 윤슬이 가진 모든 것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쉽게 싫어할 수 없게, 미워지지 않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녀의 모든 날은 추억이 되었다. 


  갑자기 비가 와서 당황하던 날은 신나게 물놀이하는 시간이 되었다. 유독 어두운 달동네는 불꽃놀이를 하기 좋은 장소가 되었고, 불규칙하게 들어선 낡은 건물들은 비밀 장소를 만들기 좋은 구조처럼 보였다. 


  그들은 골목 곳곳에 비밀 아지트를 만들어서 동네를 떠날 계획을 세웠다. 딱 스무 살이 되면 떠나자. 멀리 떠나서 자유롭고 평범하게 살자. 그들은 새롭게 시작할 날을 그리며 하루를 견뎌냈다.


  학교가 마치면 늘 어두웠다. 밤은 집으로 들어가는 시간이었고, 그들은 집에 가는 것이 숨 막혔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는 불꽃을 팔았다. 하나에 백 원이었다. 백 원으로 둘은 행복해졌다. 집에 나뒹구는 라이터로 붙인 불꽃은 집으로 가는 길을 빛나게 해주었다. 서로가 어두운 시간을 빛나게 해주었다. 


  그녀에게 밤은 공포의 시간이었다. 곁에 한별이 없는 시간이었고, 아빠가 술에 취해 폭력을 행하는 시간이었고 무력하게 맞기만 하는 시간이었다. 


  무력감이 그녀를 짓누를 때면 정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밤엔 세상도 조용해져서 마치 세상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춰버리면 공기도 멈추겠지. 공기의 흐름이 멈추면 내가 존재하는 공간의 공기는 금세 고갈되고 말겠지. 그래서였을까. 갑자기 숨이 막혀왔다. 내가 마실 공기가 내 공간에서 점점 사라지는 것처럼 가슴이 조여왔다. 


  답답함에 발버둥 치며 마주한 밤은 서러웠다. 물을 마시러 거실로 나갔다. 거실엔 초록색의 소주병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그 위로 그녀의 피가 몇 방울 떨어져 있었다. 그때 밖에 지나가는 차의 전조등에 비쳐 초록색 병과 그 위에 흩뿌려진 피가 반짝하고 빛을 냈다. 꼭 크리스마스트리 같았다. 


  그날은 크리스마스였다. 산타가 온다던 크리스마스 날 그녀는 산타보다는 저승사자를 만나고 싶었다. 저 어두운 문을 열고 더 어두운 옷을 입은 저승사자가 나타난다면, 그가 이끄는 곳이 그 어디라도 지금보다는 밝을 것 같았다. 


  사건이 일어난 날은 크리스마스가 며칠 지난 후, 그들이 성인이 되기 딱 하루 전이었다. 


  윤슬과 한별이 골목에 함께 있는 것을 본 그녀의 아빠가 그녀를 집으로 잡아끌었다. 한별은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더는 견딜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을 계속했기 때문이었다. 한별은 그녀의 집까지 쫓아갔다. 그리고 그녀를 빼 오려고 하자 그녀의 아빠는 이성을 잃었다.


  한별을 마구 폭행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두면 정말 그가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아빠에게 반항해 보려 했지만 몸은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장기간의 폭력으로 아빠 앞에 서면 몸은 자동으로 고장 나 버렸다. 


  그래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가장 강한 무기를 들어야 했다. 그녀는 칼을 들었다. 그리고 사정없이 한별을 패는 아빠의 다리에 칼을 찔렀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를 덮치던 그녀의 아빠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한별의 눈에 그녀가 보였다. 얼굴이 멍투성이가 된 그녀가 두 손으로 칼을 움켜쥐고 있었다. 손을 벌벌 떨며 칼을 떨어트릴 때, 떨어지는 칼날의 굉음과 함께 정신이 들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의 집으로 달려갔다.


  빠르게 집에 들어가 짐을 챙겼다. 별로 챙길 것도 없었다. 많은 걸 갖추고 살지 않았고, 버리고 나와도 아까울 것은 없었다. 


  방에 들어가 현금과 통장을 챙기고 옷가지 몇 개를 허둥지둥 챙겼다. 챙기면서도 그는 지금 상황이 현실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자신보다 더 떨고 있는 그녀를 위해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짐을 챙긴 뒤 거실에 있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나왔다. 손을 잡아끄는데 손이 미끄덩거렸다. 아빠의 피를 아직도 씻어내지 못한 건가 싶어 그녀의 손바닥을 바라봤다. 아빠의 피가 아니었다. 그녀의 피였다.


  그녀는 손목을 잘라버리고 싶었다. 손끝엔 아직도 감촉이 남아있었다. 힘주어 날카로운 칼을 들이밀었을 때, 북 하고 찢기는 가죽과 물컹하게 닿는 살의 촉감, 뼈에 닿은 칼끝의 감촉, 곧이어 새어 나는 피비린내. 그 감각이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손에 묻은 감촉을 어떻게 해서든 없애고 싶었다. 손을 치고 두드리고 깨물었다. 그래도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집에 도착한 그녀는 주방으로 향했다. 눈에 강판이 보였다. 강판에 손바닥을 갈았다. 살가죽이 다 벗겨지고 피가 흥건했다. 피 냄새는 또다시 조금 전의 상황을 연상시켰다. 차라리 한눈을 팔고 싶었고, 다른 곳에 정신을 잃어버리고만 싶었다. 통증이 필요했다. 


  아빠에게 맞을 때마다 그녀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픔에 정신을 잃었다. 맞는 동안 그녀의 시간은 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서 그 순간엔 사고도 멈추고 어느 순간부턴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맞고 나면 오히려 후련하기도 했다. 그녀에게 폭력은 일과로 자리 잡았다. 폭력으로 마무리하는 하루가 계속되면서 아빠의 폭력은 매일 해야 할 숙제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계속 자신을 때렸다. 그녀의 몸부림은 그가 짐을 싸고 거실에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별은 짐을 챙긴 후 그녀의 손을 잡았다. 벗겨진 살갗에 그의 손이 닿았을 때, 좀 전의 끔찍한 감각이 사라졌다. 그의 손을 잡은 그 따스한 느낌이 괴로운 감각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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