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여름 방학 (4)
한별이 윤슬을 처음 만난 건 일곱 살 때였다. 골목 어귀에서 울고 있는 그녀를 처음 봤다. 그녀는 아빠와 산다고 했다. 그는 엄마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주로 혼자 있었고, 사는 동네가 같았다.
그 무렵 그들이 사는 달동네 앞엔 큰 도로가 있었고, 도로를 사이에 두고 대형마트가 들어섰다. 그리고 마트를 기점으로 고층 브랜드 아파트가 지어지기 시작했고, 상가도 모두 새로 생겨났다. 허허벌판이던 동네가 새것으로 바뀌었다. 고작 도로 하나 사이에 빈부격차가 눈에 띄는 동네가 되었다. 그 어떤 도로보다 저 도로가 건너기 힘든 도로였다.
신도시 덕에 한별의 엄마는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고 윤슬의 아빠는 돈을 잃었다. 달동네가 재개발 지역이라고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들여 시세보다 비싸게 집을 산 것이었다. 달동네에는 어느 것 하나 새로 지어지지 않았다. 새로 지어지는 것이라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짓는 모래성뿐이었다.
그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큰 도로를 사이에 두고 초등학교가 있었다. 초등학교에는 도로 건너의 신도시 아이들과 윤슬과 한별 같은 달동네 아이들이 섞여 있었다. 그때 배웠다. 그들은 많은 것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말해보았다. 하지만 무엇이 없고,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도 세세하게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있는 것을 말했다. 있는 것을 말했을 때 없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허공은 그렇게 그려졌다.
그들은 일찍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된 나이는 고작 여덟이었다. 만일 훗날 그들이 치매에 걸려 초등학생의 기억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주변 사람 누구도 쉽게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여덟의 그들은 충분히 어른스러웠고 그 기억은 스물의 그들이 떠올려도 변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입학 후 처음 맞이하는 방학은 여름 방학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방학만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윤슬에게 방학이 즐거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학교에 들어가면서 아빠의 폭력은 시작되었다. 그녀에겐 학교가 피난처였다. 피난처에 갈 수 없는 것이 방학이었다.
그녀가 당한 학대만 학대는 아니었다. 감정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건 영혼을 때리는 행위였다. 한별에게 그 사실을 알려준 것은 그녀였다.
그녀는 자신이 그보다 덜 아픈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은 그냥 아빠를 미워하면 된다고, 떠나버리면 그만이라고 했다. 버릴 수도 없는 그가 더 아픈 거라고 했다. 그러니 그녀 앞에서 아픈 걸 티 내도 된다고 말했다. 그들은 서로가 더 아파 보였다.
그렇게 그들은 함께 자랐다. 어둠 속에서 한 땀 한 땀 간신히 수를 놓는 것처럼 그들의 고된 하루가 쌓여 어느덧 열아홉이 되었다.
윤슬은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다. 체하기 일쑤였고 배탈이나 위장병도 늘 달고 살았다. 그녀가 아플 때마다 그녀의 아빠는 딸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아무 쓸모 없는 애, 그러면서 여기저기 탈은 많이 나는 애, 그래서 더 쓸모없는 애. 문장은 계속 반복되었다. 그녀에겐 학대의 흉터만큼이나 아빠의 말도 강하게 박혀 있었다.
한별의 엄마는 그에게 집착할 뿐 제대로 보호하거나 양육하지 않았다. 점차 엄마의 외출 시간이 잦아지더니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집을 나갔다. 그는 느꼈다. 엄마는 자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애정을 주고받을 상대가 없었기에 자신을 붙잡고 살았을 뿐이었다고.
엄마가 도망간 후로 한별은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련한 기분까지 들었다. 그런데도 어딘가 아픈 것 같았다. 존재했는지도 몰랐던 몸속 어느 장기가 많이 상한 것처럼 속이 아려왔다.
그녀가 없었다면 그는 완전한 혼자가 되어 깊은 외로움을 맛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질 않았다. 그녀가 곁에 있어 줬다. 아빠에게 맞고 난 그녀를 그가 위로했던 것처럼, 집에 들어가기 싫어할 때면 같이 있어 줬던 것처럼, 일곱 살 때 처음 만난 후로 계속 옆에서 지켜줬던 것처럼. 외로워하는 한별을 위해 그녀는 그와 더욱 오랜 시간을 보냈다.
윤슬과 한별은 서로의 빈자리를 채워주었고, 그의 엄마가 떠난 후엔 더욱 그의 곁을 지켜주었다. 그럴수록 그녀의 아빠는 더욱 폭력적으로 변했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공포가 밀려왔고 그보다 더한 공포는 ‘이러다간 내가 정말 아빠를 죽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공포였다.
그녀의 아빠는 매일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한 날은 때렸다. 술에 약을 탈까. 타서 그냥 재울까. 아니다 그냥 독을 탈까. 영원히 재울까. 그럼 나도 편히 잘 수 있을까.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자신이 섬뜩해졌다. 그럴 때마다 한별을 찾았다.
인간성을 지키고 싶었다. 가정학대범 밑에서 양육되면서 이미 존엄은 많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지키고 싶은 인간성은 제발 가해자는 되지 말자는 것이었다.
인간성이라는 것도, 그걸 지키고 싶게 만든 것도 한별이었다. 그래서 더욱 그에게 의지했다. 그러나 그와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일상은 더 끔찍해졌다.
윤슬의 아빠는 분노를 조절할 수 없었다. 남자의 집에 들락거리지 말라고 딸에게 경고했지만, 윤슬은 밤늦게 들어오는 날이 잦아졌다. 자신을 무시해서, 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무시를 멈추기 위해 폭력을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