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여름 방학(3)
어느덧 해가 저물어 갔고, 윤슬과 한별의 공식적인 일과도 끝났다. 이제 밤이 오면 그들의 비공식적 일과가 시작된다. 그들은 종종 밤 사냥을 나갔다.
“나 사냥에 재능 있나 봐. 요새 장난 아냐. 포상금 모아서 뭐 사지?”
한별이 트랩과 칼, 갈고리를 챙기며 말했다.
“여름이 끝나기 전까지 누가 더 많이 버나 내기할래?”
윤슬이 가소롭다는 듯 한별을 바라봤다. 그들은 생태계 교란종인 뉴트리아를 잡으면 받게 되는 포상금을 가지고 내기를 하고 있었다.
집을 나서기 전 집안의 모든 전등을 다 껐다. 방의 모든 형광등과 식탁 위의 등, 거실 테이블과 머리맡에 둔 조명도 확인했다. 그들은 밝은 집을 원했다. 전등 스위치를 누르는 그 1초 만에 집이 환해지는 모습이 좋았다. 그래서 집을 꾸미면서 조명을 여러 개 구매했었다.
문단속을 마친 후 농장으로 향했다.
밤은 모든 색을 덮어버린다. 검게 필터가 씐 듯 보이는 세상은 오히려 하나의 유기체 같은 통일감을 줬다. 밤이 오면 낮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눈을 뜬다. 해에 가려졌던 달이라던가 더욱 크게 들리는 동물의 울음소리라던가.
반딧불이 움직이는 밤. 컴컴한 밤은 반딧불의 움직임을 따라 잠깐씩 모습을 드러냈다. 땅을 수놓는 반딧불과 하늘을 수놓는 별 사이 그와 그녀가 있었다. 그들의 사냥은 모두가 잠든 시간에 시작됐다.
여름밤은 유독 낮과는 다른 향을 냈다. 습기와 더위가 사그라드는 밤. 그러나 여전히 남아있는 습기로 주변의 향은 다른 계절에 비해 더욱 진하게 풍겨왔다. 낮 동안 햇볕을 받는 곳은 미지근했고, 그늘진 곳은 차가워졌다. 강둑의 풀잎을 손으로 훑고 지나갈 때면 구간마다 온도가 다르다는 것이 느껴졌다. 온도가 올랐다, 내렸다, 온도로 음계를 만들었다. 음계를 타고 짐승의 움직임이 들리는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야!”
윤슬이 한별을 놀래줬다.
“아, 깜짝이야.”
“왜 이렇게 놀래? 아직도 귀신 무서워하냐?”
한별의 반응에 윤슬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어릴 적부터 그는 귀신을 무서워했다. 밤이 오면 겁에 질려있었다. 그녀는 공감하지 못했다. 본 적 없는 귀신이 뭐가 그렇게나 무서운 걸까. 귀신이 때려봤자 아프지도 않을 텐데. 멍이 들지도 피가 나지도 쓰라리지도 않을 텐데, 왜 무서울까. 그녀는 사람이 무서웠다.
어릴 적 그들이 살던 달동네에는 밤이 빨리 찾아왔고 오래 지속되었다. 오래 불을 켜 놓은 상가도 없었고, 가로등도 적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엔 그와 꼭 붙어서 걸었다.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날 한별은 유독 밤길을 무서워했다. 윤슬은 뒤에서 그를 안아줬다. 그는 앞보다는 자신이 볼 수 없는 뒤를 더 무서워했다. 안아줘도 계속 무서워하자 그녀는 그를 안고 있는 것이 귀신이 아닌 사람이라는 증거를 보여주었다. 손가락의 거스러미를 잡아 뜯어 피를 냈다.
그녀의 손가락엔 늘 거스러미가 있었다. 아빠를 피해 밥을 먹어야 했고 빨리 먹어야 했다. 집엔 먹을 것도 별로 없어서 영양상태가 좋을 리 없었다.
고구마 줄기를 뜯어내듯, 과자 봉지를 벗겨내는 표피를 뜯었다. 그러자 피가 나왔다. 피로 그를 안심시켰다. 귀신은 안 다친다고, 이렇게 눈앞에서 피를 흘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안심했다. 그러면서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고 말했다.
그녀는 상관없었다. 이 정도로 아프다고 신경 쓸 거였으면 매일 밤을 새로 생긴 상처를 붙잡고 울었을 것이다. 그냥도 억울하게 수시로 생기는 상처고 피였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피를 흘린다면 처음으로 쓸모 있는 상처가, 이유 있는 상처가 되는 것이었다.
강둑을 따라 농장으로 향했다. 강물의 흐름은 달빛에 반짝였고 그 배경에 새소리가 들려왔다. 새소리에 맞춰 강물이 춤을 추는 듯했다.
풀을 밟고 흙을 건드리며, 모래 알알이 흩어지는 소리가 하나씩 들려올 때면 고요한 밤은 커다란 크로마키 공간이 됐다. 그 속에서 어린 날 운동장의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고, 예전에 살던 동네 골목길에서의 추억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들은 어린아이가 된 듯 숨바꼭질과 보물찾기를 하며 논 적도 있었다. 일부러 세상의 조명을 끄고 노는 것처럼 어릴 적 놀이를 하나씩 했다. 검은 도화지 위에 그들의 어린 시절은 다시 쓰였다.
밤은 그들이 함께 이야기하고 메모하는 시간이었다. 그들이 칼로 긁고 지나가면 그제야 조금씩 색을 보였다. 크레파스로 실컷 그림을 그린 후 그 위에 검정 크레파스를 꼼꼼하게 덧칠하는 것처럼. 그리곤 날카로운 송곳으로 그어 원하는 곳에만 색을 드러내는 것처럼.
그들은 칼을 들고 밤을 향해 걸어갔다. 칼끝으로 이슬 맺힌 풀잎을 톡톡 건드리며, 나무껍질의 촉감을 느끼며, 비닐하우스의 파이프를 타악기처럼 두드리며. 날카로운 칼끝에 그들이 꾸밀 새로운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강둑을 지나 조금 더 걷다 보면 연꽃 군락지가 나왔다. 연꽃이 풍성하게 피어났다. 윤슬이 연잎을 들고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했던 우산 춤을 췄다.
“이거 기억나?”
그녀가 춤을 추며 팔을 뻗었다. 그녀 곁에 다가온 반딧불이들이 그녀의 몸을 비췄다. 곧게 뻗은 손끝이 보였고, 반딧불의 움직임을 따라 그녀의 팔이 비쳤다. 팔에 새겨진 별 모양 문신 세 개가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반딧불이가 그녀의 팔을 톡톡 건드리는 순간, 팔에 새겨진 별들이 빛을 내는 것 같았다.
한별이 그녀를 따라 연잎 줄기를 꺾으며 답했다.
“그게 아니라 이거지. 나 억울해서 이건 절대 안 까먹어.”
한별은 어릴 적 운동회에서 췄던 우산 춤을 추며 말을 이어갔다. 여섯 명이 한 조가 되어 문양을 만드는 우산 춤에서 한별을 제외하곤, 모두가 연습한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춤췄다. 하지만 정작 완성된 모양은 제대로 춘 한별만 틀린 것처럼 보였다.
“야, 그 정도면 걔들이 짜고 너 놀린 거 아니냐.”
윤슬은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윤슬과 한별은 초등학교 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들은 학창 시절 내내 한동네에서 같이 나고 자란 단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