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여름 방학 (2)
윤슬은 골목을 걷다 동네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반갑게 인사하며 왜 요새 보이질 않았냐고 물었다. 그녀는 집안의 전자기기를 봐주러 할머니의 집을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줄 거 있어서 목이 빠져라 기다렸는데, 어딜 갔었어.”
“계속 집에 있었는데, 시간이 안 맞았나 봐요.”
할머니는 윤슬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온 김에 텔레비전 고장 난 것도 조금 봐 달라고 했다.
시골의 집들은 집 주인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듯했다. 여기저기 많이 낡아오면서 때마다 이리저리 잘 고쳐 쓴 태가 났다. 낡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인과 함께 늙어가는 것 같았다.
시골 사람들은 집에 대해 배우지 않았어도 주변에 물어가며 집을 잘 수리해서 살았다. 주택을 고치고 가꾸는 유전자가 대대로 이어지는 것처럼 어릴 때부터 혹은 부모님 때부터 살던 집을 참 잘 데리고 살고 있었다.
그녀는 할머니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주택은 제법 넓고 잘 가꾼 티가 났지만, 할머니를 따라 들어가는 방은 주택의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방이었다. 방에는 따로 주방도 있고 화장실도 있었다. 아마 오래전 주택을 지을 때부터 세를 주는 방으로 만들어 놓은 듯했다.
할머니의 가구들은 모두 오래돼 보였다. 한여름에도 에어컨 없이 선풍기만 틀어져 있었다. 그러나 문과 창문 사이에 부는 맞바람으로 집은 덥지 않았다. 마당의 감나무는 그늘이 되었고 집 곳곳에 있는 대나무 발과 거실 바닥에 깔린 대나무 자리도 한몫했다.
텔레비전 수리는 10초 만에 끝났다. 실수로 외부 입력 버튼을 눌러서 생긴 문제였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있으면 외부 입력 버튼을 한 번 더 누르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할머니의 표정은 애써 알아들은 척했지만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그녀는 그런 할머니를 보며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으면 자신에게 말하라고. 그러면서 자신의 집 위치를 설명했다. 할머니의 집에서 골목을 꺾어, 비슷비슷한 집 사이에 있는 그녀의 집을 설명했다. 할머니는 바로 알아들었다. 할머니에겐 리모컨에 있는 외부 입력 버튼을 찾는 것보다 골목을 지나 비슷비슷한 주택 사이를 찾아내는 것이 더 쉬운 듯했다.
할머니는 그녀에게 고급 요구르트 한 병을 쥐여줬다. 유산균이 들어있는데 이게 여자에게 좋은 유산균이라 요즘 광고에 많이 나오는 거라고 말했다.
요구르트를 뜯는데 쉰내가 풍겼다. 유통기한을 확인해 보니 이틀이 지났었다. 톡 쏘는 쉰내가 코끝을 건드렸다. 그렇다고 상해서 못 먹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자신을 위해 비싼 음료를 사 놓고, 마주치기만을 기다린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유산균도 균이고 뭐 큰일이 나 봤자 설사나 하겠지 싶어서 한 번에 들이켰다. 요구르트의 윗부분은 몽글몽글하게 덩어리졌다. 마시자마자 쉰내가 나는 듯하더니 톡톡 쏘는 느낌이 제법 시원하기도 했다. 식초의 시큼함이 아니라 레몬의 상큼함처럼 가벼운 신맛이 났다.
그녀가 요구르트를 마시는 동안 할머니는 텔레비전 채널을 돌렸다.
“아휴, 끝나가네.”
할머니는 화면을 보며 아쉽다는 듯 말했다. 화면에는 여름 특집으로 구미호 전이 재방송되고 있었다.
“못 보셨어요? 저거 전에 하던 거잖아요.”
“또 볼라고 했지. 구미호가 딱하잖아. 딱 하루를 남기고.”
인간이 되기까지 하루를 남기고 인간이 되지 못한 구미호가 가엽다고 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견뎌야 할 숱한 시간이 딱하다고 했다. 할머니의 말을 뒤로하고 집을 나서려는 데 할머니가 요구르트 두 개를 더 챙겨줬다.
“세 개를 샀지. 지금 먹고, 이따가 집에 가서 신랑이랑 같이 먹으라고.”
그녀는 활짝 웃으며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이 웃긴 상황을 어째야 할까, 하다가 골목을 나오는 길에 나머지 두 병도 모두 털어 마셨다. 다행히 배탈이 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