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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고선영 Mar 25. 2021

봄 편지

당신에게


봄 편지



  식물원에 주차를 했다가 그냥 나왔습니다. 혹 책 찾으러 손님이 오실까 싶어서요. 오는 길에 맛있는 라떼를 사 왔습니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아이스로 샀어요. 아이스를 먹는 일은 한 여름 외에는 별로 없는데 벚꽃이 꽤 많이 핀 것을 보니까 오늘은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오늘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신은 잘 지내고 있나요? 그곳은 따뜻한가요? 외롭지는 않나요? 갑자기 외롭냐고 물어봐서 미안해요. 내가 외로워서 그렇게 물어보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누가 받을지 모르지만 편지는 대상이 있는 거니까요. 어쩐지 안심이 돼요. 그래서 오늘은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있는 곳에는 어떤 나무가 있나요? 그 나무는 지금 어떤 변화를 보이고 있어요? 나무는 그 땅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는 증거가 되니까요. 참 중요한 식물입니다. 여기엔 벚꽃이 한창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어요. 산수유는 지지난주부터 시작되었고 이제 벚꽃과 개나리 그리고 목련 차례예요. 이렇게 자신이 꽃망울을 터뜨릴 순서를 기다렸다가 툭툭 터트리는 건 참 아름다워요. 당신은 언제쯤 터질 예정인가요?


  오다가 내가 좋아하는 동네 빵집에서 노오란 크림이 적당히 듬뿍 들어있는 슈크림 빵을 샀어요. 별일 아닌 것 같죠? 그런데 제 돈으로 슈크림 빵을 사는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이라 이 변화가 저한테는 좀 중요해요. 나무들이 꽃을 순서대로 피워내는 것처럼요. 나는 오늘 왜 슈크림빵을 샀을까요? 슈크림 빵을 먹을 때는 이가 다 빠져서 합죽이가 된 할머니처럼 먹어야 해요. 그래야 슈크림이 옆으로 찍~ 뻗어나가거나 입 꼬리에 묻히는 일이 없으니까요. 그렇게 먹는 걸 보니 웃음이 나요. 당신은 오늘 무얼 먹고 있나요?


  뜬금없는 이야길 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먹는 건 중요해요. 오늘 나에게 어떤 음식을 줄까? 는 아주 중요하죠. 마음이 외롭고 쓸쓸하다면 자신을 위해서 못하는 요리라도 한 가지 해 보세요. 전 계란 후라이도 겁내는 편이라서 계란 볶음밥을 해요. 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요. 너무 팬이 달궈지면 무서워요. 그래서 바로 계란을 두 개 깹니다. 대개는 계란 껍질 조각이 들어가요. 빼낼 때도 있지만 그렇게 안 잡히거든요. 기필코 그 속에 들어가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달까요? 그래서 그냥 두는 경우도 있어요. 소금은 2번 툭툭! 후추는 3번 후추추! 이렇게 넣고 살짝 익을 때쯤 밥공기에 한 그릇 담긴 밥을 넣어요. 잘 휘저어서 3분 정도 익히면 끝이에요. 이렇게 엉성하지만 이쁜 그릇을 골라서 거기에 완성된 밥을 담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답니다. 잊지 마세요. 아주 쉽게 기분이 좋아지는 방법이니까요.


  당신을 본 적이 없어서 어떤 사람인지 늘 궁금해요. 코는 오뚝할까? 뭉툭할까? 콧잔등 위는 매끄러울까? 기미나 주근깨가 있을까? 전 미리 말하지만 아주 예쁜 얼굴은 아니랍니다. 그렇지만 못 봐줄 얼굴도 아니에요. 그렇다고 평범한 얼굴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아요. 아직 지구에 살면서 저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발견하지는 않았으니까요. 언젠가 책방에 온 아이가 자기가 아는 사람하고 닮았다고 이야기해서 살짝 기분 나빴어요. 전 아무래도 그저 이 지구에 딱 한 명이기를 바라니까요. 오늘은 이렇게 편지를 써요. 해야 할 일이 많지만 아무려면 어때요? 꼭 지금 안 한다고 해서 큰일 나는 건 아니니까요. 매번 미뤄두는 건 게으름뱅이라는 별명을 얻기 십상이지만 한 번쯤은 괜찮아요. 오늘은 이런 편지가 제격인 날 같아요. 누가 그러냐고요? 하하하 제가요.


  그냥 헛소리일지도 모르지만 제 세상에선 제가 큰 소리로 호령하면 그게 법이 되는 거잖아요. 그게 너무 재밌어요. 당신이 제 편지를 기다릴지 모르지만... 꼭 기다렸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또 쓸 맛이 날 테니까요.


  그럼 이젠 그만 쓸게요. 진짜로. 해야 할 일을 안 하면 나중에 엉엉 울지도 모르니까요. 오늘은 엄마 생각은 안 할래요. 그러기엔 날이 너무 밝고, 꽃이 피고 그러니까요. 오늘 잘 보내요. 아주 노오란 슈크림빵 같은 하루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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