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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tlionheart Mar 05. 2024

언니가 온다 2


그렇게 번갯불에 콩구워 먹듯이 결혼을 하고 미국 뉴저지에 살게 된 언니는 결혼 생활이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70년대에 일가친척까지 미국으로 이민을 간 언니의 전남편 가족들은 끈끈한 가족애가 너무 지나쳤던 모양이었다. 시아버지가 부자이니 그 집 세 아들들은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식당에 밥 먹으러 가서도 아버지가 마음대로 시키는 음식을 먹었어야 할 정도로 아버지의 권력이 너무도 컸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견디다 못한 언니는 결혼 3년 만에 혈혈단신으로 시집에서 탈출해서 독립을 먼저 하고 이혼을 진행했었다. 그 당시 한국은 우리 부모님조차 이혼이라는 걸 받아들이기 힘든 분위기였기에, 언니는 거의 십 년 동안 한국에 들어오질 않았었다. 나중에 내가 뉴욕에 사는 언니한테 갔을 때, 언니는 의류를 생산 판매하는 다국적 기업에 들어가 마케팅 일을 하고 있었다. 의류 공장이 있는 남미로 출장을 자주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때 언니는 회사 장학금까지 받으면서 FIT에서 패션 멀천다이징(Fashion merchandising)을 공부하고 있었다.

이혼하고 나왔을 당시 얘기를 들어보면, 처음에 얻은 일은 옷에 아플리케를 만들어 다는 일이었다고 했다. 거기서 흑인들과도 같이 일하면서 싸움도 해 가면서, 점차 한 단계씩 직장을 업그레이드시켜 갔다고 했었다.


언니는 좋은 직장을 다니며 살만해지기 전 힘들었던 시기에 스웨덴 남친을 사귀게 되었었다. 그분은 언니와 나이차이가 많은 분이었는데, 언니를 많이 아껴주고 사랑해 줬던 분이다. 지금 기억으로도 그분은 행동과 말이 우아하고 인품이 좋은 분이셨다. 그분과 칠 년 동안 연애를 하면서 언니는 마음의 안식처를 찾은 듯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잦은 기침을 하던 그분은 병원에서 폐암 진단을 받고서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었다. 수술하려고 폐를 열어봤더니 이미 암이 다 퍼져있어서 다시 닫고 수술장에서 나왔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분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직장을 쉬고 있던 나는 뉴욕으로 가서 언니와 함께 병원에 매일 갔었다. 내가 뉴욕에 도착하기 전에 언니와 그분은 병실에서 목사님과 친구들 앞에서 혼인서약을 하고 정식 부부가 되었다.

하루는 언니가 평소와 달리 병원에서 같이 자자고 해서 그날은 병실의 긴 소파에서 언니와 어정쩡하게 누워서 자고 있었다. 동틀 무렵 언니와 나는 동시에 잠이 깼다. 그때 언니는 본능적으로 침대로 다가가 누워있는 그분을 쓰다듬으며, “지금 가고 있다”라고 하면서 울기 시작했다. 그분의 얼굴을 보니 영혼이 몸통에서부터 얼굴을 지나 머리끝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후 바이탈 싸인이 제로가 되면서, 간호사와 의사가 들어와 사망 선고를 했다. 그렇게 언니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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