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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희 Jun 12. 2019

거위의 꿈

꿈이 없는 그대에게

# 거위의 꿈     


언젠가 아들 녀석이 볼멘소리로 한마디 했다.

“엄마, 사람들이 꿈이 뭐냐고 묻는데 난 꿈이 없어요... ”

“괜찮아. 아직은 그럴 수 있어. 하지만 언젠가 꿈이 생기는 날이 올 거야.”     




십 년 남짓 살아온 인생에게 제법 진지한 고민인 듯했으나 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줬다. 아직 경험한 것도 많지 않고 딱히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겠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며, 아직 경험한 것이 많지 않아서 그렇다는 나의 말이 사춘기 사내아이에게 위로가 됐을까?     


몇 년 전, 큰 무대에 섰을 때다. 음악회가 있었고 나는 사회자로 무대에 섰다. 첫 무대와 다음 무대 사이에 공연이 한창이었고, 나는 무대 뒤편에서 대기하다가 잠시 반대편으로 이동할 일이 있어서 또각또각 발자국 소리를 숨죽이며 나무 바닥으로 된 무대를 걸었다. 살금살금... 내 발걸음은 조용했고 그 사이 무대는 계속 이어졌다. 무대 칸막이 사이로 비치는 조명에 아무도 보이지 않게 조심하며 걷는 나를 보는 순간... 익숙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것은 10대의 나의 모습이었다. 연극을 하겠다고 극단을 따라다니며 무대에 올랐던 그때도, 나는 빛나는 무대 뒤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나는 20년 전 내가 원하고 바라던 꿈이 무엇인지 그제야 알았다. 내가 원하는 곳은 무대였다는 것을 말이다. 주연이 아니어도 좋았다. 무대 위에서 내가 맡은 역할을 나의 색깔로 뿜어내고 오롯이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후의 박수가 필요했다는 걸 그 순간 깨달았다. 아... 나는 박수가 필요했던 사람이었다.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던 어린 시절.

나의 부모는 나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나 그 일은 내게 상처로 남았다. 기대가 없다 못해 나를 주저앉히려 했던 당신들의 계획 때문이다. 그 계획은 다름 아닌 자그마한 목욕탕 카운터에 나를 앉히려고 했던 것. 하루 종일 하는 일은 오는 손님을 달갑게 맞고, 단순한 금전을 수납하고, 손님에게 걸려온 전화를 목청껏 불러내 사람을 찾아주는 노릇 정도다. 나를 카운터에 앉히면 그 누구보다 친절할 것이고, 삥(?)을 뜯을 염려가 없었을 것이고, 인건비를 절약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단 한 번도 언니나 오빠에게는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 명석했으니까 말이다. 대학이 당연했고 대학원이 당연했고 유학이 계획된 그들에게 목욕탕 카운터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나에게는 그 자리가 합당하다고 여겨졌던 걸까... 왜 나만... 확실한 건 나에 대한 애정이 깊어서 곁에 두고 싶었던 건 아니라는 거다. 나는 그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필사적인 도피가 필요했다. 어물쩍 부모님 곁에서 머뭇거리면 잘 있던 카운터 근무자를 내보내고 나를 그 자리에 앉힐게 뻔했기 때문에 나는 어떤 핑계를 대서든 그곳을 도망가야 했다. 그것만이 내 젊음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서울로 갔다. 기본급이 겨우 보장되는 직장을 얻었다. 겨우 방세를 내고 내 용돈을 쓰고 나면 모이는 돈이 하나도 없는 생활이었지만 나는 그만두지 않았다. 성우가 되고 싶다는 꿈은 여전히 있었지만 학원비는 엄두도 안 날 만큼 고가였고 준비 없이 치른 몇 번의 공채시험에서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한번 시골뜨기는 영원한 시골뜨기다. 그러다 시골뜨기 집인걸 어찌 알았는지 창문을 뜯고 들어온 도둑에게 자취생의 세간살이를 무참히 털리고 눈뜨고 코 베어간다는 자취생활을 정리했다. 요즘 말로 취집을 한 것이다. 마침 결혼을 해도 이상한 나이가 아니었고, 마침 결혼하자는 남자가 있었다. 가정을 이루면 행복할 것만 같았다. 이제 더 이상 도망가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 남들이 다 부러워할 만큼 멋있거나 화려하게 살 계획은 없었다. 내가 원한 건 그냥 보통의 삶이었다. 남들 웃는 것만큼 웃고, 남들이 먹는 만큼 먹고, 발 뻗고 잘 집이 있고 돌아갈 집이 있고 반겨줄 동반자가 있으면 충분히 족하다고 생각했다.


결혼을 크게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부모에 네 명의 아이를 키우고 큰집 살림을 하는 엄마를 보고 자란 탓에 뭘 해도 엄마보다는 쉬울 것이기에 엄마처럼만 열심히 살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나름 한때 품었던 ‘현모양처’라는 꿈을 펼쳐볼 참이었다.

그러나 내 꿈은 보기 좋게 좌절됐다.      

그리고 또 다른 꿈의 언저리를 향해 갈 즈음 다시 한번 무릎이 꺾여야 했다. 늘 내가 꾸었던 꿈은 일상 춘몽이나 한여름 밤의 꿈처럼 손에 잡히는듯하다가 멀어져 갔다.     


2017년은 작은 꿈이 이루어지고 모든 꿈이 바스러졌던 내게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한 해였다.

방송을 그만두고 강사가 되면서 제주도 강의를 꼭 한번 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품었던 꿈이 이루어진 듯 다녀온 제주 강의 후에 마치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고 경고라도 하듯이 모든 게 물거품이 되었다.

암 선고를 받고, 수술을 하고 항암을 하며 오로지 환자로 살았던 한해였으니 내생에 그렇게 온전히 엉망진창이었던 해가 또 있으랴... 머리카락은 온통 빠지고 이어지는 방사선에 얼굴이며 온몸이 퉁퉁 붓기 시작했다. 견딜 때는 몰랐다. 내가 할 일이었기에 치러낼 수밖에 없는 과정이었다. 고통스러웠지만 불만은 없었다. 불평한다고 줄어들 고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수용의 힘이 강한 사람인지라 그 모든 게 버겁지는 않았다. 그냥 운명처럼 받아들이면 될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복잡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덕분에 모든 일을 내려놓고 1년을 휴가처럼 썼으니 안식년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 모든 게 회복되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런 소소한 일상조차 간절히 꿈꾸었던 때가 있었으니 나는 지금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해야 하는 걸까. 잃었던 일상을 찾고 내 자리로 돌아왔을 때 오히려 선명히 꿈꾸는 방법을 알 게 됐다고 하면 어떻게 들릴까.

일상을 찾아가면서 내가 욕심을 낸 것이 있다면 바로 ‘즐거움’이었다. 하나 둘 일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오면서 일을 즐겼고, 더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 졌다. 재미와 즐거움으로 일을 하는 순간, 비로소 온전히 나의 몸과 마음이 충만해짐을 깨달았다.     

행운이었다. 온전히 즐겁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었다. 새로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것은  분명한 행복이었다.


“프로 게이머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요. 실제로 프로게이머들은 밥 먹고 게임만 해야 한대요. 그런 너무 힘들고 즐겁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프로게이머는 안 하기로 했어요.”

아이의 꿈이 살포시 피어오르려다 불씨가 완전히 소멸된 순간이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별 헤는 맘으로 없는 길 가려네.

노래 가사처럼 우리는 꿈을 꾼다.     

꿈을 찾아가는 여정. 나다움을 발견하고, 내가 잘하는 것을 하고, 하고 싶은 것을 알아가는 것...  반짝반짝 빛나는 꿈은 터널 저 끝에 보이는 불빛 같은 것 아닐까. 아직 여전히 어둡지만 뒤돌아 갈 것이 아니요, 더 이상 헤매지 않도록 희미하게 라도 보이는 빛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는 것.      

아직 꿈이 없다던 나의 2호도 언젠가 희미하게 스며드는 빛줄기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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