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화살 쏘듯 날리는 우리에게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엄마들은 아이 따라서 친구가 생기게 마련이다. 한마디로 아이 또래 친구 엄마들과 말을 섞다 보면 ‘누구 엄마’라는 이름으로 알게 되는 엄마들이 생긴다. 조리원 엄마, 문화센터 엄마, 학교 같은 반 엄마 이런 식이다. 그 모임이 쭉 연결되기는 쉽지 않지만, 같은 그룹에도 말이 잘 통하는 사람 한두 명은 만나게 마련이고, 볼 때마다 반가운 사람도 생기게 되어있다.
아이 출산으로 한동안 못 가던 문화센터를 다시 가게 되었을 때 오랫동안 못 만났던 한 엄마를 만났다. 너무 반가워서 인사를 하는데, 살이 얼마나 빠졌던지 하마터면 못 알아볼 정도였다. 원래도 예쁜 엄마였는데, 체중이 줄고 나니 고운 얼굴이 더 빛났다. 최고의 성형은 다이어트라더니 예전의 몸을 찾은 그녀는 생기 있는 얼굴이었다. 그런 그녀가 내게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었다며 말문을 열었다.
“사실은요, 그때 저한테 뚱뚱하다고 해서 너무 충격 먹고 제가 다이어트를 결심한 거거든요. 지민 엄마 아니었으면 저 아직도 살 못 빼고 있을 거예요! 고마워요!”
“제가요? 제가 민서엄마한테 뚱뚱하다고 말했다고요? 어머, 내가 왜 그랬대요? 미쳤나 봐...”
평상시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충격적인 이야기라거나, 듣고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말은 안 하려고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라,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상처되는 말을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가 없는 말을 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상황은 이러했다고 한다.
그날도 아이들을 문화센터 수업에 들여보내고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요즘 엄마들은 왜 이렇게 날씬한 거냐며 묻는 그녀의 질문에 내가 답하기를 “다른 엄마들이 날씬한 게 아니고 민서엄마가 뚱뚱한 거예요.”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돌직구를 제대로 날린 것이었다. 사실 그 엄마는 평균 체중보다 더 나가 보이는 통통하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더 풍족한 몸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그렇기로서니 내가 그렇게 대답을 했다니 나는 심히 충격이었다. 내가 해놓은 말도 기억을 못 하고, 그럴 리가 없다며 발뺌을 하려고 하다니... 낯이 부끄러워짐을 느꼈다.
“미안해요. 내가 왜 그랬을까요? 상대방 기분 나쁠 말은 내가 진짜 안 하려고 하는데... ”
“아녜요. 그 말 듣고 그날 집에 가서 거울을 봤는데 진짜 내가 뚱뚱하더라고요. 자꾸 옷이 안 맞아서 옷을 점점 더 크게 사 입으면서도 나는 내가 살이 찌고 있는 걸 오르고 있었어요. 그냥 옷이 안 맞는다고만 생각했는데, 그 말을 듣고 저를 바로 보게 된 거죠. 같이 사는 남편도 나한테 살찐다는 말을 안 해주고... 저는 정말 몰랐거든요. 그런데 덕분에 알게 되고 살을 뺐으니 내가 고마워요!"
목소리가 상냥하고 차근차근한 말투의 그녀는 진심으로 말하는 것으로 보였다. 진심 그녀의 논리대로라면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내가 누군가에게 말을 거르지 않고 상대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고 말을 했다는 사실이 내겐 너무 충격이었다. 나름 말을 조심한다고 하는데도 툭 턴지는 말이 무심코 던진 돌이 되어 개구리 사망하게 만드는 형국이었다.
아... 폭력적인 나의 주둥이라니...
팩폭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팩트 폭력.
‘내가 틀린 말 했어? 내가 없는 말 했냐고?’
시시비비 따지고 싸울 때 주로 하는 말이다. 따지기로 하자면 팩트가 주된 근거가 될 테지만 이 팩트라는 것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 다시 말하면 팩트는 폭력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머리가 나쁜 사람에게 ‘너는 왜 그렇게 머리가 나쁘니?’ 라거나,
인물이 별로인 사람에게 ‘너는 왜 그렇게 못생겼니?’ 라거나,
키가 작은 사람에게 ‘너는 왜 그렇게 키가 작니?’라는 말들 말이다.
‘왜 그렇게’라는 것은 없다. 키가 작고 싶어서 작고, 안 예쁘고 싶어서 못나고, 머리 나쁘고 싶어서 아둔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나무라거나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스무 살 무렵이었다.
한때 테트리스라는 게임에 빠져서 친구와 번갈아 단계를 깨고 있었는데, 내가 막대를 엉뚱한 곳에 넣어 레벨을 올리지 못하는 걸 보던 친구가 “너는 왜 그걸 거기다가 넣어? 뇌가 없어?” 하는 것이다. 몸이 마음 같지 않고, 머리가 따로 놀고, 손이 따로 놀다 보니 흔히 생기는 일이었지만, 나 스스로도 바보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 시점에 그 말을 들으니 충격이었다. 웃자고 하는 말이 다큐로 받아들여져 그 자리에서 눈물이 났다.
“맞아. 나는 뇌가 없나 봐. 무뇌아 인가 봐. 아메바 인가 봐.”
울다가 웃다가, 웃다가 울다가 결국 우리의 장르는 코미디가 되었지만, 아직도 오래전 그날을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충격이 엄청났었나 보다.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상처를 사람들에게 주면서 살고 있을까. 내 마당에 있는 돌멩이 걷어내겠다고 아무렇지 않게 던져버린 것이 누군가에게 무기가 되고, 남의 마당에 있는 잡초 정리해 주겠다고 뽑아내는 작업이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 나누던 마음의 벗 뺏어가는 일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