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가 부러울 때
- 00 부장님은 오실 때마다 정말 젠틀하시고 매너가 좋으세요.
- 응, 박대리. 나도 그런 것 같아. 늘 웃는 인상이셔. VIP실로 바로 들어가셔도 되는데 항상 번호표 뽑고 앉아 계시고.
- 그쵸. 전 저분이 그 부장님인 줄도 몰라봤어요.
- 그러게. 00 회장님도 그렇고 00 여사님도 늘 다른 일반 고객님들처럼 앉아서 기다리시잖아. 존경한다. 절대 대우받으려고 하질 않으셔.
보통의 VIP들은 어떻게 해서든 더 대우를 받고 싶어 한다.
혹시라도 은행 규정 상 요청하는 업무를 거절할 경우에는 설명 못 들었다고 우기기 일쑤다.
- 아니, 이렇게 계속 앉혀 놓으면 어떡해요? 그건 은행 일이니까 알아서 해결을 해야지. 되게 만드는 건 본인들 일이니까.
- 죄송합니다. 엊그제 법인 대출을 진행한 걸 몰랐어요. 그럼 구속성 때문에 개인 예금 가입이 안 되는 거 대표님께서도 잘 아시잖아요.
- 아니, 알든 말든 그게 문제냐고. 암튼 해놔요. 나는 나갈 테니까. 내가 이 은행 거래를 이십 년 넘게 했는데.
(하, 저따위로 꼭 해야 돼요? 우기면 다냐고요. 은행 거래 이십 년 넘게 했으면 뻔히 알면서.)
(일단 박대리, 제가 가서 사과드릴 테니 방법 좀 찾아봐요.)
요즘처럼 규정에 대한 내부 통제가 심해지면, 해 주고 싶어도 해 줄 수 없는 상황이 많다.
어떤 VIP들은 꼭 지점장부터 찾는다.
- 00에서 왔는데 지점장님 계신가요?
- 지금 외근 중이신데, 약속하고 오셨어요?
- 그럼 부지점장님은요?
- 어떤 업무 때문에 그러세요? 제가 도와 드릴게요.
- 아니, 그냥 부지점장님 좀 불러 주세요.
(뭐야, 막 들어가는데요?)
(에효. 나도 모르겠다. 어차피 부지점장님께 말씀하시면 일만 힘들어지는데 꼭 저러더라.)
(대우받고 싶어서 그런 거죠.)
(부지점장님이 우리한테 일 전달하고, 우리가 필요서류 얘기하면, 또 그거 다시 부지점장님이 고객한테 전달하고, 상담하다가 놓치는 거 있으면 또 전달해야 하는데.)
(일이 한 세네 배는 느려지는데, 왜 그걸 모를까요?)
(모르니까 저러지. 00 회장님 같았으면 번호표 뽑으시고 지금 이미 업무처리하고 계실걸.)
여유가 있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실수가 잦고, 그 일을 급히 해결하려다 보니 바빠지고, 방법을 생각할 시간이 없어서 잘못된 선택을 한다.
조금만 생각을 해 보면, 업무를 실무자한테 맡기고 처리하는 것이 본인한테 유리하다는 것을 알 텐데 안타깝다.
시시때때로 바뀌는 데다가 점점 더 강화되는 은행 규정은 실무자조차 모두 습득하기 어렵다.
지점장님 찾으시려거든 실무자 먼저 만나시고 해도 늦지 않습니다.
출근시간을 5분 늦추면서, 나도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부려 본다. 뜨거운 물을 끓이는 동안 우유 거품기로 따뜻한 우유를 만들고, 마지막에 넣을 시나몬 시럽까지.
아침에 커피 한 잔 만드는 여유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