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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성에 낀 거울을 닦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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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거울: 내가 들여다보면 내가 사라져버리는 벽 또는 언어


살그머니 들어갈 것 두리번거리지 말 것 의심하지 말 것 거울 속으로 손을 뻗지 말 것 뒤돌아보지 말 것


어제의 시간과 내일의 시간이 거울로 걸어 들어와 조우한다 복받쳐올라 서로 아무 말 못한다 쓰다듬지도 못한다 한없이 쳐다보고만 있다 거울을 보면 입을 다물게 되는 이유다


거울을 들여다본다 시간이 움찔한다 한 두 번 그러는 것도 아닌데 매번 그런다


거울 속에서 내 얼굴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다 나는 꽃잎도 아닌데 더욱 나는 불빛도 아닌데


흐르는 것들은 제 안에 골짜기를 감추고 있어 어둠 속에는 어둠이 구름 속에는 구름이 모래 속에는 모래가 씨앗 속에는 씨앗이 허공 속에는 허공이 거울 속에는 거울이 얼굴 속에는 얼굴이 들어 있다


사람들은 종종 타인의 얼굴에 시선을 자석처럼 붙이고 따라가며 구경한다 시간의 창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을 볼 때는 멈칫한다 시간의 벽이기 때문이다


질주하는 몸은 공포로 가득 찬 몸이다 거울 속으로 달려가면 거울 끝에 벽이 있다 질주하던 몸은 날계란처럼 터진다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벽 때문에 바로 뒤의 벽을 떠올리지 못한다 진짜 벽을 감추기 위한 거울의 위장술이다 거울은 진화한다


거울을 스칠 때마다 얼굴이 베인다 거울에 베인 내 얼굴에는 시간이 핏물처럼 스민다


거울의 꿈은 제 내부를 온전하게 텅 비우는 것이다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 때까지만 꿈인 것이어서 거울은 계속 실존한다


벽 속에서 거울이 투명하게 썩어간다 거울 속의 나도 투명하게 썩어간다


거울: 내가 밖으로 나와도 내가 사라지지 않는 내가 갇혀서 끓고 있는 진창


-이원 <거울을 위하여>




물리적 거울은 자주 보지 않는다


참 정직한 거울은 티와 흠을 고스란히 고자질한다


오래 거울 앞에 머물수록 못난 부분이 부풀어 올라


추상적이고 상징적 거울이 더 친숙하다


겉보다 속을 비춰주니 어떤 단점도 나만 볼 수 있다


뒤적이면서 꼼꼼하게 조율하다보면 겸허해진다


무엇보다 장점은 뒷면이 더 명확하게 보인다는 점


거울이 벽에서 창으로 변신한다


현재만 보여주던 거울이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여준다 시간의 확장은 시야의 확대를 말한다


믿으려면 보이는 것만 맛보지 말아요


진실은 거울 후면에 잔뜩 웅크리고 있어서 슬프다


잘 고쳐보려고 거울 앞에 섰다가 망쳐버린 기억들


거울을 깨고 그 자리에 우물을 걸어버리고 싶었던


겨울에는 거울에 낀 성에를 잘 닦고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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