챌린지 91호
아들에게
이 성 복
아들아 시를 쓰면서 나는 사랑을 배웠다 폭력이 없는 나라,
그곳에 조금씩 다가갔다 폭력이 없는 나라, 머리카락에
머리카락 눕듯 사람들 어울리는 곳, 아들아 네 마음속이었다
아들아 시를 쓰면서 나는 지둔의 감칠맛을 알게 되었다
지겹고 지겨운 일이다 가슴이 콩콩 뛰어도 쥐새끼 한마리
나타나지 않는다 지겹고 지겹고 무덥다 그러나 늦게 오는 사람이
안 온다는 보장은 없다 늦게 오는 사람이 드디어 오면
나는 그와 함께 네 마음속에 입장할 것이다 발가락마다
싹이 돋을 것이다 손가락마다 이파리 돋을 것이다 다알리아 구근 같은
내 아들아 네가 내 말을 믿으면 다알리아 꽃이 될 것이다
틀림없이 된다 믿음으로 세운 천국을 믿음으로 부술 수도 있다
믿음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 아들아 시를 쓰면서 나는
내 나이 또래의 작부들과 작부들의 물수건과 속쓰림을 만끽하였다
시로 쓰고 쓰고 쓰고나서 남는 작부들, 물수건, 속쓰림......
사랑은 응시하는 것이다 빈말이라도 따뜻이 말해주는 것이다 아들아
빈말이 따뜻한 시대가 왔으니 만끽하여라 한 시대의 어리석음과
또 한 시대의 송구스러움을 마셔라 마음껏 마시고 나서 토하지 마라
아들아 시를 쓰면서 나는 고향을 버렸다 꿈엔들 네 고향을 묻지 마라
생각지도 마라 지금은 고향 대신 물이 흐르고 고향 대신 재가 뿌려진다
우리는 누구나 성기 끝에서 왔고 칼 끝을 향해 간다
성기로 칼을 찌를 수는 없다 찌르기 전에 한 번 더 깊이 찔려라
찔리고 나서도 피를 부르지 마라 아들아 길게 찔리고 피 안 흘리는 순간,
고요한 시, 고요한 사랑을 받아라 네게 준다 받아라
쓰고 싶지 않으면서 쓰고 있는 이 순간은 무엇인가
먹고 싶지 않으면서 먹고 있는 이 상황과 비슷한가
생존과 무관한 것이 생존을 닮아가고 있을 때에는
생존을 다룰 때와 같은 태도로 전환해야 마땅하다
먹기 위해 쓰는 것과 달리 쓰기 위해서 먹고 있는
혹은 먹으니까 쓰고 있거나 쓰니까 먹고 있는 상태
간혹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이 역전되는 때가 오면
주저하거나 머뭇거리거나 후회하지 않아야 한다
그곳에 호수가 생기고 마을이 펼치고 산이 솟는다
자연은 자연스럽게 생기다 사라지는 성질이 아니라
불쑥 나타나서 돌연 휩쓸다가 냉큼 변신을 꾀한다
그런 날들이 부지기수이기에 천연덕스러운 일상들
나의 변덕은 자연이 심술부리는 요술이 반영된 탓
어제는 하늘로 손짓을 하다가
오늘은 땅으로 발짓을 하고는
내일은 어디로 손발짓 하려나
늘 부끄러운 글은 지우지 못하고 남겨둔 글들이다
https://youtu.be/8t_Lt4u1LpY?si=eiDB8OikxyiMal1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