챌린지 112호
당신이라는 세상
박 준
술잔에 입도 한번 못 대고 당신이 내 앞에 있다 나는 이 많은 술을 왜 혼자 마셔야 하는지 몰라 한다 이렇게 많은 술을 마실 때면 나는 자식을 잃은 내 부모를 버리고 형제가 없는 목사의 딸을 버리고 삼치 같은 생선을 잘 발라먹지 못하는 친구를 버린다 버리고 나서 생각한다
나는 빈방으로 끌고 들어가는 여백이 고맙다고, 청파에는 골목이 많고 골목이 많아 가로등도 많고 가로등이 많아 밤도 많다고, 조선낫 조선무 조선간장 조선대파처럼 조선이 들어가는 이름치고 만만한 것은 하나 없다고, 북방의 굿에는 옷이 들고 남쪽의 굿에는 노래가 든다고
생각한다 버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버리는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버릴 생각만 하는 것도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도 한다
술이 깬다 그래도 당신은 나를 버리지 못한다 술이 깨고 나서 처음 바라본 당신의 얼굴이 온통 내 세상 같다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
대단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말하지 않아도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
말을 하니 몰랐던 대단한 사람들이 있다
대단한 사람들은 대단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서 대단한 사람들이 되는 것이라고 믿는 대단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서 누가 대단한지 알 수가 없다
대단한 사람들이 있다
대단한 사람들이 정말 있다
분명 대단한 사람들이었다가 대단하지 않은 사람들로 되기도 하는데 그 반대보다 빈번하다
대단한 사람들이 있는 것과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감탄하고 알아차리는 것은 사뭇 다르다
대단한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명명되는 순간 대단하지 않은 사람으로 스위치가 전환된다
그래서 대단한 사람들은 많아도 구분할 수 없다
이따금 우리는 대단한 사람들이 된다
아무도 대단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유효하다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유혹을 피하지 못한다
대단한 사람이 되려고 대단하지 않는 동작으로 대단한 사람들에게로 달려간다
이때의 동작들을 백 분의 일초 단위로 나누어 보면 대단하지 않는 사람들의 관절과 놀랍게도 유사하다
전문가들조차 이 차이를 포착하지 못해 울상이다
이토록 섬세한 부분이 있어 아직 대단한 사람 감별사가 한반도에 없다 (결코 무용해서가 아니다)
간절하면 대단해지는 것일까
역동작으로 되감기로 보면 대단한 사람들의 관절변화와 대단하지 않은 사람들의 관절변화가 분명하게 구분된다는 어느 대단하지 않았던 연구자의 대단한 발표는 한때 노벨상에 거론된다
나도 언젠가 그대의 대단함을 얼핏 본 적이 있다
말을 하려다 그대가 대단하지 않은 사람으로 전환되거나 이미 알고 있는 걸 굳이 말해 뭐하나 싶기도 해서 혹은 착시일지도 모른다는 염려에서 그만 놓친 대단하지 않은 기억이 있다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