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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Jun 06. 2024

방은 상자 속

0725

텅 빈 방을 감각한다.


이미 점령한 사물의 영역을 제외한 공간에 있다.


천장의 몰딩이 만나는 모서리의 각도가 비스듬히 누워서 보면 둔각으로 보인다.


잘 속는 눈으로 좌우의 벽면을 번갈아가면서 본다.


뒤목덜미를 잡힌 채 걸린 옷들을 걷어 갠다.


서랍에 하나씩 눕혀 재우고 옷걸이를 비운다.


미풍으로 선풍기는 절레절레 의심하면 돌고 있다.


창과 문을 닫으니 방은 상자 속이다.


내일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아무도 개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방의 공기를 진공청소기로 모두 빼고
시로 가득 채워주세요


빈 방에 있을 때에는 머릿속이 시냇물처럼 맑아진다.


상자 위로 비가 때리고 무지개가 뜬다.


뻥튀기를 원반처럼 날리고 가사 없는 노랠 부른다.


팽개쳐 둔 영화포스터에서 배우들이 나와 뛰어다니고 강아지 별이는 꼬리를 흔든다.


구름도 보이고 해도 밝은데 소나기가 길게 내린다.


아파트 각 집에서 샤워기를 길게 뽑아내 창 밖으로 물을 뿌리는 퍼포먼스가 진행 중이다.


관리사무소에서 알려드립니다
오늘은 만우절도 아닌데
주민 여러분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수백 개의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소리에 안내방송이 희미하게 들린다.


방은 안전하다.


2중으로 포장되어 있어서 어지간한 충격에도 끄떡없다.


오늘도 세 걸음 남짓한 상자 안에서 평온했다.


밀봉이 된 이 상자가 개봉되지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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